서백의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54 - 태백산 정암사 본문

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54 - 태백산 정암사

徐白(서백) 2011. 3. 1. 18:30

정암사(淨岩寺)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태백산 줄기의 함백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이다. 정암사(淨巖寺)는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과 더불어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서 636년(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년)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한 뒤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창건하였고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 하여 정암사(淨岩寺)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훗날 일명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했다.(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만년에 서울을 떠나 강릉군(지금의 명주)에 수다사를 짓고 머물다가 꿈에 이상한 승려의 갈반지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듣고 태백산으로 찾아가 석남원을 짓고 머물렀던 곳이 정암사의 창건 역사이다)

 

조선시대 후기인 1713년(숙종 39년) 자인(慈忍), 일종(一宗), 천밀(天密) 스님 등이 수마노탑을 중수하였으나, 그 해 8월 낙뢰로 탑의 일부가 파손되자 6년 후인 1719년 천밀 스님이 다시 탑을 중수하였으며, 1788년(정조 12년) 취암(翠巖), 성우(性愚) 스님이 적멸보궁을 중창하고 탑을 보수하였다. 그리고 1858년(철종 9년) 해월(海月) 스님과 대규(大圭) 스님이 적멸보궁과 탑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효봉(曉峰) 스님이 정암사에 3년 이상 머물며 수행 정진하였고, 해방 후에도 지월(指月), 서옹(西翁) 스님 등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였으며, 1919년 보룡(普龍) 스님이 사찰을 일신 중창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1972년 낙후된 수마노탑의 중수를 시작으로 등각(等覺), 삼지(三智), 법보(法寶) 스님이 차례로 주지를 맡으면서 많은 건물을 세워 오늘날과 같은 대찰의 면모를 이루어 놓았다.

 

 

사찰로 들어가는 문(門) 가운데 첫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그러나 정암사(淨岩寺)에는 천왕문과 불이문 등은 없고 일주문만 있다. 건물양식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1칸씩의 규모를 하고 있으며,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처마 아래의 평방 위에는 "태백산정암사(太白山淨岩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탄허 택성(呑虛 宅成, 1913~1983) 스님이 쓴 글씨다. 그 밖에도 경내에 걸려 있는 육화정사(六和精舍), 범종각(梵鐘閣), 삼성각(三聖閣), 관음전(觀音殿),  자화각(慈花閣) 등의 편액이 탄허 스님의 글씨다.

 

 

일주문에서의 정암사 전경

 

 

수마노탑에서 내려다본 정암사 전경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범종각(梵鐘閣)이다.  내부에는 범종(梵鐘)을 비치하고 있다. 특별히 절에 있는 종(鐘)은 불교를 의미하는 ‘범(梵)’자를 붙여 범종(梵鐘)이라고 부른다. ‘범(梵)은 범어(梵語) ’브라흐마(Brahma)'를 음역(音譯)하여 범(梵)이라 한 것이며, 불전사물 중의 하나인 범종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친다.

 

 

이 주목은 약 1300년전 자장율사가 정암사를 창건하시고 평소 사용하시던 주장자를 꽂아 신표로 남기신 나무라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가지의 일부가 회생되어 성장하고 있어 자장율사의 옛모습을 보는 듯하다.

 

 

 적멸궁(寂滅宮)은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자장 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참배하기 위해 건립한 법당이다.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이 적멸궁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현재의 건물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인데, 「정암사사적」에 따르면 1770년(영조 46년)에 중수한 모습이 남아 있다. 그 뒤에도 1858년(철종 9년)과 1919년에 각각 중수한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흔히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하는데, 정암사에서는 '적멸궁(寂滅宮)'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는 "번뇌가 사라져 깨달음에 이른 경계의 보배로운 궁전"을 의미한다. 

 

 

적멸궁의 뒤쪽 산 위의 수마노탑에 석가모니 부처님 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이 적멸궁의 불단 위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불량원(佛粮願)이라고 적힌 이 비(碑)는 적멸궁(寂滅宮) 중창불사에 쓰일 곡식을 시주한 사람들의 원(願)이 적힌 비(碑)이며, 우측에 건륭 42년 ? 4월이란 글씨가 있는 데, 이는 영조 47년(1771년)에 적멸궁을 고쳐 지은 후에 정조 1년 정유년(건륭 42년,1777년)에 세워진 것이다.

 

 

 적멸보궁 뒤편,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보물 제410호로 지정된 수마노탑(水馬瑙塔)이 서 있다. 초층의 탑신 남면 중앙에는 화강암으로 틀을 짜서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문비(門扉)는 1매의 판석으로 만들어 졌으나, 중앙에 종선(縱線)을 음각하여 2매의 문비임을 나타내려고 하였고, 중심에는 철제 문고리를 달았다. 이 탑은 거대한 편은 아니나 형태가 정제되고 수법이 정교하다. 옥개 우각 추녀 밑의 상향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잃지 않은 것이고, 청동제 상륜의 투각수법 또한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탑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연화문이나 안상문 등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탑은 오래 전부터 각층의 모전석이 결실되거나 파손되어 보물로 지정할 때부터 보수 문제로 논의되어 오다가 1972년 전면 해체·복원되었다.

 

 

삼성각 앞에서 바라보는 수마노탑의 모습

 

 

 

 

육화정사(六和精舍)은 종무소 겸 요사로, 팔작지붕에 앞면 7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근래에 지었다. 육화정사(六和精舍)라고 쓴 편액은 탄허스님의 글씨이다.

 

 

 

팔작지붕에 앞면 7칸, 옆면 3칸의 규모로 근래에 지었다. 가운데 1칸을 금동 관음보살좌상을 모시는 전각으로 꾸몄고, 나머지는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관음전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 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관(寶冠)의 중앙에 아미타여래좌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 관음보살좌상은 장식 면에서 화려함보다는 단정한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관음보살의 자비심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함일 듯하다. 왼손으로 보병(寶甁)을 들고 있다.

 

 

 

삼성각은 자화각과 나란히 있으며,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근래에 지었다. 안에는 칠성탱을 비롯하여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자화각(慈花閣)은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1칸씩의 규모로 근래에 지은 건물로, 삼성각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안에는 창건주인 자장율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정암사의 자화각(慈花閣)에 모셔진 자장율사 진영이다.

 

[인물탐구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년)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년)는 신라후기의 고승으로 성은 김, 속명은 선종랑(善宗郞)이다. 자장의 아버지인 무림은 진골출신으로 소판(蘇判)의 관직을 지냈다. 늙도록 아들이 없었던 무림은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여 마침내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초파일에 자장을 낳았다.
 
자장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으며, 부모를 여읜 후부터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홀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조그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기만 하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을 물리쳤다.
 
그때 선덕여왕이 여러차례 조정의 재상으로 관직을 청하였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취임하지 않으면 곧 목을 베리라"는 명을 내렸다. 자장은 끝내 굽히지 않고,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 뒤로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계를 받으러 찾아왔으나 그럴수록 자장은 당나라로 들어가 불법을 더욱 익혀 크게 교화하기를 바라였다. 마침내 636년(선덕여왕 5년)에 승실(僧實) 등의 제자 10여명과 당나라로 건너가 문수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기도하던 중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사구게(四句偈)를 주었다. 이 게송이 바로 화엄의 내용을 천명하는 것으로,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화엄사상의 묘지(妙旨)를 터득하였던 것이다.
 
이후 중국에 더 머무르다가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장경 4백여 함과 당번(幢幡), 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돌아와 오대산에 월정사를 창건하였다. 그 뒤로 분황사에 머물면서 왕궁에서는 대승론을 강의하고 황룡사에서는 보살계본을 설했다. 이 시기에 조정의 최고 고문인 대국통(大國統)의 자리에 추대되어 황룡사를 비롯하여 월정사, 태화사, 대둔사를 차례로 창건했다. 또한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여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하였고, 취서산 독룡이 사는 연못을 메우고는 통도사를 창건하여 금강계단을 설치했다. 
 
황룡사의 탑을 아홉 층으로 함은 주변의 아홉 나라가 신라를 중심으로 뭉쳐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상징하는 것이니 신앙심 뿐만 아니라,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 왕실의 권위와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필요성 또한 깊이 작용했다.
 
이렇듯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교단의 기강확립에 혼심의 힘을 다하니 스님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해마다 늘어났다. 만년에는 서라벌을 떠나 명주 땅을 찾아나서 강릉 가까운 곳에 수다사를 세웠고 꿈 속에서 이끌린 대로 태백산 갈반지를 찾아 석남원을 세우고 입적할 때까지 이 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설화]정암사 창건 설화

"갈래사사적기"에 의하면 자장 율사가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라고 하였다. 스님이 아침에 대송정에 가보니 문수 보살이 나타나,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서 만나자.”하고 사라졌다.
 
자장 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임을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바로 지금의 정암사이다.
 
창건에 관해 또 다른 일설에는 자장 율사가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에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적명보궁·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 하였다고 전한다.
 
갈래사의 창건과 함께 이 절에는 세 탑이 세워졌다. 곧 정암사의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금탑, 은탑, 수마노탑의 세 보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우리가 볼 수 있는 탑은 수마노탑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