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목포의 유달산과 갓바위 본문
유달산(儒達山)은 높이 228m. 산정이 가파르고 기암절벽이 첩첩이 쌓여 있어 호남의 개골산(皆骨山)으로도 불린다. 산의 동쪽과 남쪽의 완경사 산록은 이미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산정에서는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과거 외적을 경계하던 봉수대가 2개 남아 있다. 약 100m 내려오면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와 노적봉이 있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가장해 적을 속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기슭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조각공원이 있으며, 그 옆쪽으로는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난(蘭)공원이 있어 유달산의 운치를 더해준다. 그밖에 대학루·관운각·소요정·유선각·달성각과 유달사·수도사·관음사 등의 사찰이 있다. 유선각(儒仙閣)은 1932년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해 건립했으며, 처음에는 목조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콘크리트로 개축했다. 또한 이충무공 동상, 어린이 헌장탑과 놀이터, 4·19기념탑, 충혼탑,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바다에 임해 있는 서쪽 산록에 유달해수욕장이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가장해 적을 속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노적봉에 있는 다산목(多産木)
유달산을 오르다 첫번째 만나는 복바위이다. 혹은 쥐바위, 탕건바위로 불리며, 복을 비는 사람 모양, 또는 쥐모양, 탕건모양으로 보여져 붙여진 이름이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대학루(待鶴樓)
이난영(목포 출신)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유선각(儒仙閣)
유선각(儒仙閣)의 편액(扁額)은 1951년에 독립투사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4∼1956년) 선생이 목포 방문길에 유달산에 들렀다가 남긴 글씨이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는 1956년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대통령 유세를 위해 전북 이리(현재 익산)로 가기 위해 호남선 열차를 탓다가 급서(急逝)하였다.
유달산에서 본 목포 시내 전경
애기바위 혹은 두엄씨바위라고 하며, 큰엄씨가 애기를 업고, 작은 엄씨에게 등을 돌리고, 작은 엄씨도 애기를 업었는데, 큰엄씨를 보려고 하는 모양의 바위이다.
나막신 처럼 끝이 살짝 올라간 나막신바위
유달산 일등봉 아래의 바위면에 새겨진 부동명왕(不動明王)은 불교에서 팔대명왕(八大明王)의 하나, 중앙을 지키며 일체의 악마를 굴복시키는 왕으로, 보리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여 이렇게 이른다. 오른손에는 항마검(악마를 항복케 하는 칼)을, 왼손에는 오라를 잡고 불꽃을 등진 채 대좌에 앉아 성난 모습을 하고 있다. 제개장보살의 변화신으로 오대명왕의 하나이기도 하다. 부동명왕은 밀교의 주불인 대일여래의 화신이다. 또한 부동명왕은 대일여래의 사자로서 밀교의 5대명왕 중 한사람으로서 많은 밀교인들의 숭앙의 대상이다. 1920년에 일본 불교의 여러개 종파가 목포지역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에 진언종파가 유달산에 진언종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부동명상(不動明王像)과 홍법대사상(弘法大師像)을 만들었으나, 현재 이곳 일등바위 암벽의 조각상만 전해 오고 있다.
부동명왕의 우측에는 '유달산신(儒達山神)'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신라계 명승 홍법대사 공해(弘法大師 空海, 774∼835년)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승전(僧傳)으로 평가한 '일본고승전요문초(日本高僧傳要文抄, 1251년 추정)에 의하면 '홍법대사 공해는 신라 신족(神族)'이라고 쓰여 있다. 20세 무렵에 출가하여 이름을 쿠카이(空海)라 하였고, '진언종(眞言宗)은 쿠카이(空海)가 일본에 개창한 종파의 종명(宗名)이고, 밀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스스로 종교체험을 하고 밀교사상을 이해하고 조직적으로 체계를 세운 사람이 홍법대사 쿠카이(空海)이다.
전남 목포시 용해동 86-24 인접해역에 있는 목포 갓바위는 천연기념물 제500호, 이 갓바위는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풍화혈(風化穴; tafoni)로서 삿갓을 쓴 사람의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갓바위는 인위적 요인이 전혀 작용하지 않고 해역의 풍화환경에서 자연적인 과정으로 빚어진 풍화혈 상태의 자연 조각품이며 다른 지역 풍화혈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성 을 가지고 있다.
목포 갓바위에 얽힌 전설 - 갯마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신 가난한 소금장수 청년이 살고 있었다. 가난하여 약 한첩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청년의 아버지는 날로 병환이 악화되어 갔다. 청년은 안타깝기만 했다. 그는 스스로 큰 결심을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 약값을 충분히 벌어야 집에 돌아온다고 다짐했다. 힘에 겹도록 소금짐을 짊어지고 떠났다. 그러나 딱하게도 소금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청년은 날품이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유해 보이는 집을 찾아 갔다. 그 집주인은 소문난 구두쇠로 한 달 동안을 일하고 품삯을 달라는 청년에게, "그동안 먹여준 밥값도 못한 주제에 품삯은 무슨 놈의 품삯이냐" 며 쫓아버렸다. 아버지 약값을 구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터라 길거리에 주저앉아 신세 한탄만 하고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난 던 도승이 청년을 보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기에 그리 한숨을 쉬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자초지종 그의 처지를 말했다.
얘기를 들은 도승은 크게 낯색이 변하며 청년을 꾸짖었다. "청년은 한가지만 생각했지 깊은 생각이 부족했네, 자네가 약값을 마련하겠다고 타향을 전전하고 있는 동안 병든 아버지는 누가 돌보았겠으며 그동안에 죽었다면 애써 약값을 마련했다 한들 무슨 소용있겠나" 그때서야 병든 아버지를 생각한 청년은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청년은 그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이승에서 편히 지내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저승에서나 편히 쉬게하는 것이 그의 도리라 생각하고 관을 메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산을 헤매던 청년은 지금의 갓바위 곁에서 앞을 바라보니 시원하기가 그지없고 양지바른 이 곳에 묘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관을 바닷가에 놓고 묘를 파던 청년은 그만 실수를 저질러 곁에 둔 관을 건드렸던지 관이 데굴데굴 굴러 바닷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다. 넋을 잃은 청년은 행여 관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영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를 내려다 보면서 엉엉 울던 청년은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놈이라며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이 곳에 아버지바위와 아들바위가 솟아 오르고, 아들은 죄진 몸이라 하늘을 대할수 없어 삿갓을 쓰고 있었다. 이 삿갓은 넓이가 6 m가량이고 한쪽 깃이 2m가량이나 된다. 청년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팠다는 바위의 윗 부분은 바위가 널리 깔린 탓인지 풀이 자라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청년이 파헤쳐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갓바위 전설 자료 출처 : http://chldud.com.n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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