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33 - 남방불교 전래의 설화가 깃든 장유사(장유암) 본문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 용지봉 아래에 위치한 장유사(長遊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말사이다. 장유사의 사기(寺記)에 따르면, 48년에 서역(인도) 아유타국의 태자이자 승려인 장유화상(허보옥)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후가 된 누이 허황옥과 함께 이곳으로 와서 최초 남방불교의 전설이 깃든 장유사(장유암)를 창건하였다.
한편 설화에 의하면,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왕녀로서, 하늘의 계시를 받은 부왕의 명령으로 서기 48년, 파사석탑을 실은 배를 타고 김해로 들어와 수로왕과 결혼하였고,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150년이나 해로하였다고 전한다.『삼국유사』의 「금관성파사석탑」조에 의하면, 금관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현재는 허왕후릉 앞에 있음)은 허황후가 배를 타고 서역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온 것이다. 공주는 처음에 부모의 명으로 바다 건너 동쪽으로 가려 했는데, 수신(水神)의 노여움으로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에 부왕이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하였다 한다.
허황옥은 김수로왕에게 시집 와 아들 열명과 딸 하나를 낳았다. 첫째 아들 장자는 수로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거등왕이고, 둘째 셋째는 허황옥의 성을 쫓아 허씨 성을 받았다. 그래서 김해김씨, 김해허씨, 인천이씨는 같은 시조이다.나머지 일곱 아들은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하였으며, 장유화상은 조카 일곱을 데리고 불모산 기슭에서 수행에 전념하였는데, 아들이 보고 싶은 허황후가 자주 장유암에 들리니 수행에 방해받는다 하여 멀리 지리산 반야봉 아래 칠불암으로 자리를 옮겨 수행을 계속하게 하여 일곱왕자를 득불시켰다고 한다. 즉 장유사는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칠불암으로 가서 수행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 뒤 선찰(禪刹)로 일관해 오면서 많은 수도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세운 장유화상사리탑은 현재에도 이 절에 남아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탑을 헐어서 부장품을 훔쳐갔으며, 그 뒤 파손된 탑을 복원하였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민족항일기에 이르기까지 중건ㆍ중수를 거듭하였으나 6ㆍ25전쟁 이후에 점차 퇴락하였다. 1980년부터 주지 화엄(華嚴) 스님께서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지금의 사찰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고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박정규 전 민정수석이 사법시험 준비를 할 때, 함께 이곳에서 공부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다.
또한 장유사 인근에는 조선 후기에 폐사된 왕후사지(王后寺址)가 있는데, 왕후사는 장유사와의 분쟁으로 혁파되었다고 한다. 왕후사는 질지왕이 허왕후의 공덕을 기리고 명복을 기원하기 위한 원찰(願刹)로서 김수로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나 장막을 치고 합환한 전설이 깃든 곳에 세운 사찰이라고 하며, 두 줄기의 계곡물이 합쳐지는 풍수지리상의 길지(吉地)라고 하여 현재는 묘소로 바뀌어 있다.
장유사의 경내로 들어서는 첫 건물로, 속계와 진계를 구별 짓는 당우이다. 1층에는 양쪽으로 사천왕을 봉안하였고, 2층에는 범종과 법고를 안치하여 범종루와 천왕문의 역활을 겸하고 있다.
천왕문 입구 우측에 모셔져 있는 금동지장보살좌상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으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장유사 경내 전경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대웅전 모습
대웅전 전면
대웅전 어칸의 꽃살문(1)
대웅전 어칸의 꽃살문(2)
대웅전 어칸 좌우의 협칸 창호에 새겨진 새와 매화 문양
대웅전 어칸 좌우의 협칸 창호에 새겨진 거북과 난초 문양
대웅전 어칸 좌우의 협칸 창호에 새겨진 국화 문양
대웅전 어칸 좌우의 협칸 창호에 새겨진 대나무 문양
대웅전 불단 위에 모셔진 석가삼존불(좌우 협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대웅전 불단 측면에있는 신중탱. 이 신중탱에는 동진보살과 예적금강이 함께 모셔져 있다.
대웅전 불단 측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진 여러 목조나한상 중의 한 모습
용(龍)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대웅전 용마루의 모습이다. 중국 명나라 호승지(胡承之)라는 사람이 쓴 책 “진주선(眞珠船)”에 의하면, 용은 아홉 아들(龍生九子)을 두었다고 한다. 그 구룡(九龍) 중에 첫 아들은 비희(혹은 패하)라고 하며 모양은 거북을 닮았으며, 특히 무거운 것을 좋아해 돌비석 아래 귀부로 놓거나 주춧돌 아래에서 집을 떠받치고 있다.
용의 둘째 아들인 이문(또는 조풍, 혹은 치미)은 멀리 바라보기 위해 높은 곳을 좋아하고, 잘보는 능력을 가진 용이라서 지붕 위에 세운다. 예를 들면 궁궐의 경우에 임금이 궁궐에만 머물러 있어도 만 백성을 두루 살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치미는 화마를 누르는 힘이 있다고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목조건물의 지붕 위에 놓는다.
행선실과 종무소 건물
'행선실(行禪室)' 편액이 걸려있는 요사채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야 만날 수 있는 삼성각의 모습
장유화상 부도탑 앞에서 본 삼성각
삼성각에 봉안된 칠성탱을 비롯한 독성탱과 산신탱
삼성각 측면에 모셔진 장유화상 진영
삼성각 앞에서 본 장유사 전경
가락국 수로왕의 처남인 장유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1500년전에 제작된 석조팔각 사리탑은 제작기법 상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팔각원당형의 장유화상사리탑(경남 문화재자료 제31호)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연화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을 얹었다. 장유화상기적비는 가락국의 불교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장유화상사리탑 좌측에 있는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
대웅전 뒤쪽에 위치한 장유화상사리탑에서 바라본 장유 율하신도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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