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02 - 고즈넉한 산사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보개산 각연사 본문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9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각연사는 칠보산과 보개산의 계곡이 서로 만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에는 칠보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수원과 경북 영덕에 칠보산이 있으며 경북 영덕의 칠보산은 더덕, 황기, 산삼, 돌옷, 멧돼지, 철, 구리 등 동식물과 광물질을 포함한 7가지가 풍부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칠보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땅이 칠보로 되어 광채가 빛난다고 하니, 각연사가 있는 칠보산은 바로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표현한 칠보에서 생겨난 산이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보개산도 불교적인 산 이름이다. 보개(寶蓋)는 천개라고도 하며, 석탑 상륜부에서 부처님의 법신을 상징하는 보륜을 덮고 있는 것도 보개이고, 법당의 불단 위에 만들어져 있는 닫집도 일종의 보개라 할 수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곳에 위치한 각연사이지만 이미 신라조에 사찰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신라말과 고려초에는 대단한 사세를 갖고 있던 사찰이었다고 한다. 경내에는 많은 문화재와 함께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온 석재들이 남아 있어 각연사가 천년고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각연사의 창건에는 현재 두 가지 설이 전한다. 하나는 신라 법흥황 때에 유일(有一)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과 신라말 경순왕의 원찰로서 통일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전해 오는데, 각연사 “대웅전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각연사는 신라말 경순왕의 원찰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절 근처에 세워져 있는 통일대사탑비에 따르면 통일대사라는 분은 이 시기에 활동했던 승려이다. 이 비문의 내용으로 보면 창건 기록과 통일대사의 활동시기가 비교적 일치하고 있다. 또한 비로전 내에 걸려있었다던 “연풍군 장풍면 태성동 독점원 보개산 각연사 삼세여래급 관음보살 개금기”에서도 각연사는 통일대사가 창건했다고 하고 있다. 절의 창건과 연혁 등의 기록으로 볼 때 각연사는 오히려 통일대사와 관련된 듯하다.
조선시대에 와서 각연사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각연사는 정자산(亭子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에도 각연사가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조선 중기에도 매우 활발한 중창이 있었으며 근래에 와서도 불사는 계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현재 각연사 경내에는 보물 제433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1292호 통일대사 탑비, 보물 제1370호 통일대사 부도, 충북 유형문화재 제125호 비로전, 충북 유형문화재 제126호 대웅전, 충북 유형문화재 제212호 석조귀부가 남아 있다.
근래에 새로 지은 각연사의 일주문에는 “보개산각연사(寶蓋山覺淵寺)”라고 현판을 달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지붕의 측면 박공면에는 외부의 비바람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할 수 있게 풍판을 달아 놓았다. 이곳에서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각연사 경내가 시작된다.
비로전 영역에서 본 각연사 전경
옛날의 사세를 가름해 볼 수 있는 여러 석재들이 경내에 남아있어 각연사의 오랜 역사를 대변해 주는 듯하다.
각연사의 종무를 보는 종무소를 겸한 요사채로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다. 전면에서는 단층 건물이지만 뒤쪽에서는 중층의 모습이며 아랫층은 공양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불전사물인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를 봉안해 놓은 범종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건물에 칠성, 독성, 산신을 함께 모셔 놓은 삼성각이다. 조선시대 사찰에서는 각각 다른 독립된 전각에 봉안하거나 한분만 모시는 경우가 많았으나 근래에 와서는 삼성각에 세 분을 같이 봉안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삼성각의 기단은 자연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이중기단이다. 초석(주춧돌)과 디딤돌도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가장자리의 초석에는 쇠시리와 고맥이가 새겨져 있어 원래 다른 건물에 사용했던 초석을 재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26호 대웅전
각연사의 주불전이다. 그리고 대웅(大雄)이란 큰 영웅인 석가모니를 이르는 말이다. 큰 힘으로
대웅전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융경(隆慶,1567~1572), 순치(順治,1644~1661), 강희(康熙,1662~1722) 년간에 대웅전을 중수한 바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의 대웅전은 1768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건물로 지붕 측면의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아 외부의 비바람으로부터 벽면을 보호하고 있다.
주춧돌은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은 자연석(막돌초석)이다. 어간의 좌우 기둥 상부에는 용두(용머리)를 조각해 얹었다. 공포는 다포식의 공포로 외3출목, 내5출목으로 구성했다. 내부 출목이 5출목인 건물은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건물에서 많이 확인되는 모습이다.
기단은 다듬은 긴 장대석을 가로로 4단씩 쌓아 만든 장대석기단이다. 이 기단은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된 기단으로 흔히 볼 수 있는 기단이다. 주계단도 기단과 마찬가지로 장대석을 쌓아 만들었다.
대웅전 안에는 불단을 만들고 삼존불을 봉안했는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협시는 관세음보살, 우협시는 지장보살을 봉안하였다. 닫집은 보궁형으로 만들었으며 매우 화려한 모습이다. 삼존불 뒤 후불탱은 삼불회도(三佛會圖)이다. 내부 천장은 빗천장과 우물천장을 조합해 만들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구성했다.
삼존불 왼편에는 대장부상(승려상)이 모셔져 있는데, 각연사에서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절의 창건자 유일(有一)대사라는 설과 중국의 달마(達磨)대사라는 설이 있다.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에 단장(短杖, 신분이 높은 사람이 권위의 상징으로 또는 호신용으로 이용)이 들려 있다.
대웅전에 모셔진 104위(位) 신중탱으로 화면의 중앙 상단에는 예적금강이 위치하고, 좌우상하에는 보살상과 사천왕을 비롯한 여러 신중들이 호위하고 있는 신중탱이다.
도리 혹은 장혀가 중간에서 처지는 것을 방지해 주는 역활을 하는 것을 화반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가장 일반적인 화반의 모양은 절구통 모양의 판재에 파련을 조각한 파련형화반이고 그외에 '人'자형화반, 동자주형화반, 사다리형화반, 방형화반 등 모양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다. 그런데 각연사 대웅전 도리 위를 받치고 있는 화반은 다른 목조 건물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코끼리형화반으로 매우 특이한 화반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25호 비로전
정면 3칸, 측면 3칸에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의 모양이다. 공포는 내외 모두 2출목에 다포식 공포이고, 법당 안에는 석조비로자나불을 봉안했다. 특히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용한 천장이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현재 각연사에 건립되어 있는 전각들 중에서 조성연대가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비로전은 1648년에 만들어졌고, 상량문에 의하면 1655년, 1899년, 1927년에 각각 중수한 바가 있다고 한다. 기단은 낮게 만들었는데 다듬은 돌을 이용해 한 단(외벌대)만 쌓았다.
비로전 건물 정면의 고맥이와 고맥이초석
초석 상부에는 쇠시리(초석의 주좌와 초반이 만나는 경계선 부분을 곡선으로 접는데 이를 쇠시리라 한다.)가 표현되어 있으며, 초석의 주좌(운두) 양쪽에 하방폭으로 살을 덧붙인 초석을 고맥이초석이라고 한다. 고맥이초석은 하방(기둥 하부를 가로로 연결하는 부재)을 받치는 고맥이석과 연결되어 하방 하부의 마감을 깔끔하게 해준다.
조선시대에 마루가 깔리면서 하방이 높아졌고 하방이 높아지면서 고맥이석과 고맥이초석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쇠시리와 고맥이초석은 대부분 신라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다. 지금도 영주 부석사에 가면 무량수전에서 고맥이초석과 고맥이석이 사용된 사례를 볼 수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광배에 새겨진 9구의 화불 가운데 근접 촬영한 1구의 화불 모습
보물 433호 석조비로자나불
불교에서 연화장 세계(蓮華藏 世界)란 연꽃에서 출생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있는(含藏,함장된) 세계라는 뜻으로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이며 화엄경의 주존인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부속전각에 모셔놓은 법당을 비로전이라고 한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법신불인데 법신이란 ‘진리 그자체’라는 뜻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인은 지권인이라고 하는데,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말아 쥐고있다. 가끔 왼손이 위로 가고 오른손이 아래로 가는 경우도 있다.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요, 왼손은 중생세계를 표현하는데,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둘이 아님을 나타내며, 진리의 몸으로 중생세계를 감싸고 있음을 뜻한다. 그 사찰의 주존불로 모셔질 때는 좌우협시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고 대적광전 혹은 대광명전이라는 편액을 쓰며 선종사찰에서 주로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지권인의 수인을 한 부처님은 우리나라에서 9~10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각연사 비로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은 높이 3m의 석불좌상으로 광배는 위가 뾰족한 보주형(寶珠形)으로 몸 전체를 받드는 거신광(擧身光)인데, 두 줄의 양각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頭身光)을 구분하고 있다. 표면에는 화불 9구를 조각하였다.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대좌는 지대석 위에 팔각의 하대석이 놓여 있으며, 각 면에 안상(眼象)을 장식하였다. 4면의 안상 안에 향로를, 2면에는 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다른 2면에는 2좌씩의 비천상을 아름답게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전체에 웅장한 구름 무늬를 굵게 새기고 7면에는 각기 중앙에 짐승의 얼굴을 조각하였으며, 짐승의 머리는 그 형태가 상하좌우로 향하고 있다. 상대석은 앙련으로조각되어 있다. 대좌의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당시의 가장 뛰어난 조각품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보물 1295호 통일대사 탑비
고려 전기의 승려인 통일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비(碑)로 각연사 동남쪽의 보개산 계곡을 따라 1㎞쯤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탑비(塔碑)는 고승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스님께서 입적하시면 좋은 자리를 찾아 장사를 지낸다. 장사를 지낸 후에 부도를 만들고 스님의 행장과 모든 제반 내용을 조정에 올리게 된다. 이를 받은 조정은 스님의 업적에 따라 탑비 건립 여부를 판단한 이후, 탑비에 새겨질 스님의 행장을 당대 최고 문장가에게 기술하게 하고 임금은 스님의 시호를 내리게 된다. 이후 시호와 문장을 사찰에 보내 탑비가 건립된다.
이런 연유로 탑비가 일반 승려라면 탑비가 남아있을리 없다. 대부분 당대 국사급의 고승 대덕만이 탑비를 갖게 되는 것이며, 이 탑비의 기록은 당대 불교사 연구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그러나 탑비의 탑신이 남아 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탑비가 부러져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연사의 통일대사 탑비는 탑신이 건립당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탑비의 내용이 오랜 세월과 더불어 그 내용이 마모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히 탑비의 내용 중에서 이 비가 통일대사(通一大師)의 탑비이며, 스님이 당나라에 유학하셨고, 고려 태조를 만난 일이 있으며, 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이 ‘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당대의 문장가였던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는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비는 고려 광조 9년(958)에 건립되었다.

각연사의 창건에는 하나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유일대사께서 이 근처에 절을 짓고자 했다. 처음에는 절터를 현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 절말에 잡고 사람들을 모아 공사를 진행 하고 있었는데, 각종 목재를 다듬고 난 이후 남은 대패밥이 다음날이면 말끔하게 사라지고 또 다음날에도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대사는 우연히 수 백마리의 까마귀떼가 날아와 대패밥을 입에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음날 까마귀떼를 쫓아 가보니 거대한 수풀로 둘러쌓인 산중에 커다란 연못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까마귀떼는 이 연못에 대패밥을 떨어뜨리며 합장하듯 짖어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대사는 연못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하며, 넓은 자리가 과연 천하의 명당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대사는 쌍곡리의 절을 계속 짓도록 함과 동시에 사람들을 데려와 연못을 메우고 이곳에 새로운 사찰을 짓고자 했다. 연못을 메우는데 연못 안에서 광채가 보여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속에 1기의 석불이 계셨다. 이에 황급히 연못 속의 부처님을 꺼내 모시고 못을 메워 절을 완공하고 깨달을 覺, 못 淵자를 써 각연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석불이 현재 각연사 비로전에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이는 유일대사와 관련된 창건설화로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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