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황산벌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백제의 충신 계백장군 묘를 찾아서 본문

문화유적

황산벌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백제의 충신 계백장군 묘를 찾아서

徐白(서백) 2012. 11. 8. 08:26

백제시대 말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나아가 신라의 5만 대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최후를 마친 백제 충신 계백장군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찾았다. 예로부터 논산은 삼남지방(三南地方)과 기호지방(畿湖地方)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황산벌전투는 우연이 아니었다.

 

백제와 신라의 치열했던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장군은 오천결사대와 함께 잠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554년 백제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641년 의자왕(義滋王)의 즉위 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결국 660년(의자왕20)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의자왕은 계백(階白, ?∼660)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다.

 

계백은 전장에 출전하기 전에 자기의 처자들이 패전 뒤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하여 미리 자기 손으로 죽였으며, 자신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했다.

 

병사들에게도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했다.

 

그가 이끄는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의 5만여 군사와 4차례나 싸워 이겼다. 그러나 결국 16세의 나이 어린 화랑 관창(官昌)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이 패전으로 백제는 마지막 희망마저 잃고,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계백장군 묘는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장군의 충절어린 의로운 죽음을 보고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 한 것이었다.

 

백제의 멸망은 결과적으로 고구려를 고립시켰으며 고구려의 멸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라를 위해 장렬한 죽음을 택한 계백의 생애는 후대인들에게 높이 칭송되었고,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 서거정(徐居正)은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라고 칭송했다.

 

조선 숙종 6년(1680)에는 충곡서원(忠谷書院)이 건립되었는데, 계백장군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지금은 계백장군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중심으로 성역화사업이 진행중이며 계백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장사에서 매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자료 출처 : 논산시청, 다음 백과)

 

 보충 설명

삼남지방 :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을 말한다.

기호지방 : 경기도, 충청남도 북부지방, 황해도 남부 지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사진1,2,3) - 계백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충장사 전경. 

 

 

                                 (사진 3,4) - 백제의 충신 계백장군이 잠들어 있는 묘역 전경.

 

                                              (사진6) - 잘 정비된 계백장군 묘역 주변.

 

                                 (사진7) - 계백장군 묘역 입구에 있는 백제군사박물관.

 

2004년 9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건립되었고, 내부에는 백제시대의 유물은 물론 그 시대의 군사적 모습을 전시하는 등 백제의 군사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사진8,9) - 백제군사박물관 내부.

 

                (사진10) - 계백장군 묘역에서 사단법인 미소원 문화유적답사회 회원들의 인증샷

 

 

계백의 달 / 윤순정 시인

 

백중보름이라 했다
그런 날이면 어쩌다 붉은 달을 볼 수 있다 했다

나는 그 달을 가슴에 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나 품었던 뜨거운 가슴으로,
달이 울고 있었다
붉게 멍든 가슴으로 울음 삼키고 있었다.


아련한 등잔불 밑으로
다소곳이 아미 숙여오는 밤이면
하, 조신하여 하얀 보름달 같았을 백제의 여인
깊고 아득한 눈빛으로 裸身 슬어 내리며
굵고 단단한 두 팔로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안을 때마다
이 뜨거움은 무엇이란 말이냐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곰삭이며
젊은 계백은 되뇌었을 것이다.


칼을 받아라
나의 마지막 사랑이니라
여인은 울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계백의 깊은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큰 사랑이 황홀하여 목을 길게 늘였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평화롭게 모시조개를 건져 올리던 아이들
백강 위로 짙은 안개 서서히 풀리며 햇살 드러나고 있었다

계백은 울지 않았다

백제불멸의 제단에 바쳐질 운명
운명에 앞서 이미 스스로 내일을 정각했던 계백
그는 아들을 베인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투구를 들어올린 소년은 입술이 붉었다
끝내 되돌아 온 화랑의 勇과 氣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비의 가슴으로 관창의 머리를 돌려보냈다
죽이지 않는 것이 자극하지 않는 것임을 계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황산벌 불멸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랑이
목숨을 접수함으로 사랑을 완성한 계백의 사랑보다 더 고귀한 사랑 있으랴
하늘까지 뻗친 장도의 날 끝에서 영원히 빛 부실 휴머니즘이여,
21세기의 청명한 동편의 밤하늘에
피를 삼킨 붉은 달이 울고 있었다
계백의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