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68 - 강천산 강천사

徐白(서백) 2011. 11. 28. 16:03

 

가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지만 가을의 끝자락에 남겨진 강천산(剛泉山)을 부산불교방송산악회에서 다녀왔다(11월 27일). 아직도 가을을 보내기가 아쉬웠는지 강천산과 강천사에는 많은 등산객과 나들이 인파들로 붐볐다. 여러번 다녀왔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절집을 둘러보기 위해 산행 후 바쁘게 하산하니 대웅전 부처님께서 근엄한 표정으로 '자네 오랫만에 왔구나. 어서오게' 하면서 나를 반겨 주신다.

 

강천산은 산과 계곡이 유명해서인지, 산 이름의 '강(剛)'은 금강산(金剛山)에서 따 왔고, 시원한 계곡물을 상징하듯 '천(泉)' 자를 붙여 놓았습니다. 강천산의 품안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강천사(剛泉寺)는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7번지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로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강천산에 있는 아름다운 절집이다. 절에서 전하기로는 887년(진성여왕 1)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1316년(충숙왕 3)에 덕현(德賢) 스님이 중창하면서 오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강천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선조 임금 때 학자였던 귀봉 송익필이 이곳에 유숙하면서 '宿 剛泉寺(숙 강천사)'라는 제목의 시를 지은 것에서 강천사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서는 1482년(성종13)에 작성된 「강천사모연문」을 통해 이 해에 절이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연문은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가 적은 글로서 당시 강천사의 중건에 관련된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다. 신말주는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1470년(성종 1)에 순창에 내려가 오랫동안 있었다고 한다. 중조 스님은 설씨의 도움을 얻어 중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때의 중창은 설씨 부인의 힘이 매우 컸는데,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권위가 사회를 지배하던 당시에 여인의 힘으로 큰 불사를 이룬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후 절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으나 1604년(선조 37)에 소요(逍遙)대사가 중창했다. 한편 1760년(영조 36)에 출판된 『옥천군지』에는 당시 절의 부속암자로 명적암, 용대암, 연대암, 왕주암, 적지암 등 5개 암자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절의 규모가 컸음을 집작케 한다. 이어서 1855년(철종 6)에는 금용(金容) 스님이 중창했다. 근래에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불탔으나, 1978년에 보광전을 새로 지었으며, 1992년에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바꾸었고, 2001년에 일주문을 새로 조성하였다.

 

                  강천사로 오르는 초입에 있는 병풍폭포

 

 

강천사의 일주문에 해당하는 강천문이다. '剛泉門(강천문)'이라고 쓴 편액의 좌측 관지(款識)를 보면 '辛巳仲春(신사중춘)'은 2001년 음력 2월을 나타내며, '南谷 金基旭(남곡 김기욱)'이 쓴 글씨이다.

 

 

건물양식이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원형주초 위에 원형기둥을 받치고 주심포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75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 '洗心臺(세심대)'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요사채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염화실(拈華室)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 조실스님이나 주지스님이 계시는 방을 염화실(拈華室)이라 하며, 염화(拈華)란 말도 부처님의 법(法)을 전해 받았다는 가섭존자의 염화미소(拈花敬笑)에서 비롯된 말이다.

 

'古達 崔承活(고달 최승활)'이 쓴 '大雄殿(대웅전)' 편액(扁額)

 

1961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위에 팔작지붕으로 만든 목조건물이고, 원형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형식으로 세웠다. 창호는 어칸은 3분합문이고 좌우의 협칸은 각각 2분합문이다. 내부의 천장은 목조 구조가 들어나 보이는 연등천장이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대웅전의 수미단(불단) 위에는 석가삼존불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고, 좌우의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다. 두 보살상의 지물은 관음보살상이 연꽃봉오리를 들고 있으며 지장보살상은 육환장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 '강천사 오층석탑'은 1316년(충숙왕 3)에 덕현(德玄) 스님이 세운 것이다. 방형의 큰 돌 위에 초층 탑신을 직접 세운 석탑으로,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의 돌로 구성되었다. 초층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었고 그 위에는 왼쪽 부분이 심하게 파손된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옥개석은 3단의 층급받침을 갖추고 있는데, 옥개석의 윗면에는 1단의 낮은 탑신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2층과 3층 탑신도 우주가 조각되었지만 초층 탑신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었다. 층급받침 역시 3단으로 구성되었지만 1층의 그것보다 더 높다. 옥개석 상부에는 1단의 탑신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4층 탑신석은 3층 탑신석에 비해 높고 우주가 모각되지 않았으므로 나중에 보완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복발과 보륜이 남아있다. 이 석탑은 현재 원형을 잃었지만 원래는 5층이었고, 초층에 비해 2층 이상이 급격히 줄어든 점 등에서 신라 일반형 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부분적으로 백제 석탑 양식을 반영한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명문이 새겨진 괘불대 3기가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에는 ‘乾隆八歲十五(건륭팔세십오)’로 되어 있어 170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괘불석주의 우측에 ‘乾隆八歲'의 글씨가 보인다. 참고로 청나라 연호인 '乾隆(건륭)' 연호는 1735~1795년까지 사용되었다.

 

선방으로 사용되는 심우대(尋牛臺)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고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앞마루를 덧내었고, 덤벙주초 위에 원형기둥을 세운 주심포 형식의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서 본 망배단(望拜亶)

 

 

 

전북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창 삼인대 (淳昌 三印臺)'는 조선시대의 역사적인 장소로 단경왕후 신씨 복위 상소를 올렸던 장소이다.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과 혼인하였다. 한편 박원종은 연산군이 나라를 다스릴 때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이때 누이인 월산대군의 부인(연산군의 백모)이 조카인 연산군에게 겁탈 당하고 죽자 그를 복수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조선 연산군 12년(1506) 훈구세력인 성희안과 박원종이 임사홍 등과 결합하여 포악한 정치를 거듭하던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공신들은 중종의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 하여 7일만에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궁궐에서 쫓아냈다. 한편 중종은 왕비 신씨를 폐출하고 장경왕후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10년만에 돌아가시자, 이 소식이 전해들은 당시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 등이 회동 결의하여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를 다시 왕비로 모시자는 복위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관직에서 쫓겨날 것과 죽음을 각오하고 관직을 표시하는 도장(職印:직인)을 소나무가지에 걸었다. 그 후 이곳에 비각을 세워 삼인대(三人臺)라 하였다. 단경왕후 신씨는 명종 12년(1557)에 71세로 돌아가셨으며, 폐위되고 232년이 되던 해인 영조 15년(1739년)에 왕후로 복위되었다.

 

강천산 구름다리(현수교) - 강천산은 높이 584m. '호남의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노령산맥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광덕산, 산성산, 추월산 등이 있다. 산은 낮으나 기암절벽과 계곡 및 울창한 숲 등이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강천산, 강천호, 광덕산, 산성산을 포함한 일대가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절벽의 계곡 사이를 잇는 현수교(구름다리)는 높이 50미터, 길이 76미터이다. 이 현수교를 지나 강천사까지 이르는 계곡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 있어 절경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