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徐白(서백) 2011. 9. 10. 16:08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명승 제40호 소쇄원(瀟灑園)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자연과 인공을 절묘하게 이뤄내며, 그 안에는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의 조성은 조선시대 중종 때의 선비인 소쇄공 양산보(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정원인 소쇄원을 지었으며, 정확한 조성시기는 1520년대 후반에서 153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다시 복원 중수하고 현재까지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잘 가꾸어 나가고 있는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이라 할 수 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 휴전 교섭이 결렬된 뒤, 선조 30년(1597)에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와 일으킨 전쟁이다. 이순신 등의 활약으로 큰 타격을 입은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자 철수하였다.

 

소쇄원 배치도이다. 1번은 제월당, 2번은 광풍각, 3번은 협문, 4번은 대봉대, 5번은 광석(廣石), 6번은 연지, 7번은 애양단, 8번은 오곡문, 9번은 정천(頂泉), 11번은 위교, 14번은 관리동이다.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소쇄원(瀟灑園) 들어가는 길

 

                                                      소쇄원(瀟灑園)의 대나무 숲

 

 

 

소쇄원에서 또 하나의 정자에 해당하는 초가 정자에는 '봉황을 기다리는 누대'라는 뜻의 '대봉대(待鳳臺)' 현판이 걸려 있다. 

 

            대봉대(待鳳臺)에서 오곡문(五谷門)으로 가면서 우측 담벼락에 적혀 있는 애양단(愛陽壇) 글씨

 

 

 

                                   소쇄원(瀟灑園)에 있는 광풍각(光風閣)의 정면과 측면의 모습

 

                                     소쇄원(瀟灑園)의 광풍각(光風閣)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

 

 

 

 

          담장 밑에 계곡물이 흐르는 도랑을 만들고, 그 위에 담을 쳐놓음은 하나의 신기에 속한다.

                  오곡류는 바로 그 아래이며, 우측으로 오곡문을 나서면 뒷산으로 이어진다.

 

 

소쇄원 오곡문에서 제월당으로 향하며 보이는 언덕의 담장을 소슬담장으로 꾸미고 담벽에는 소쇄원의 문패에 속하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洒處士梁公之廬)」라는 송시열이 쓴 편액이 박혀 있다.  그리고 소쇄처사((瀟洒處士)는 바로 소쇄공 양산보를 가리킨다.

 

                                                       제월당(霽月堂)의 전면  

 

 

                                                           제월당(霽月堂)의 측면  

 

                                                           제월당(霽月堂)의 뒷면

 

건축양식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인 팔작지붕의 한식기와 건물이다. 광풍각의 배면에 여러개의 단을 올려 주거형식으로 건축하여 전면에 마당을 두었다. 좌측 1칸은 다락을 둔 온돌방이며, 중앙칸과 우측 1칸은 우물마루구조인데, 전면과 좌측면은 개방되어 있는 반면에 뒷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한 높이 1.3m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한 형태로 처마는 홑처마이며 추녀 끝에는 활주를 세웠다. 제월당은 소당(小堂), 고당(高堂)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월당은 정자라기 보다는 정사(精舍)의 성격을 띄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물론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지는 하지만 제월당은 『유서석록』이 제작된 당시인 1574년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당호인 제월당(霽月堂)의 제월(霽月)은 ‘비 갠 뒤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소쇄원(瀟灑園)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