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 편액
표충사 대광전 편액과 홍제사 설법보전, 예림서원 편액
徐白(서백)
2011. 4. 13. 00:07
밀양 표충사에 주법당인 대광전(大光殿)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선생의 글씨이다.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 백운거사(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서예의 각체에 두루 능하며 특히 활달한 대필서로 이름을 날렸다.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彌勒佛) 예서, 내금강의 천하기절(大下奇絶) 초서, 법기보살(法起菩薩) 해서 등 각서(刻書)가 남아 있고 전국의 궁전·사찰·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희정당대조전'(熙政堂大造殿) 등이 유명하다.
밀양 무안면에 있는 홍제사의 설법보전(說法寶殿) 편액은 구하스님의 글씨이다. 5세에 사서삼경을 다 떼었을 정도로 신동이었던 구하스님은 1884년 13세에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해 1889년 18세에 경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은 성해스님을 만나 그의 법제자가 되어 ‘구하’라는 법호를 받게 된다. 특히 기도를 열심히 하기로 소문난 구하스님은 1911년 통도사 주지가 된 후에 강원과 선원을 복원했다. 1950년에는 초대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했다. 구하스님은 1965년 11월24일 한낮 “나 이제 갈란다. 너무 오래 사바에 있었어. 그리고 다시 통도사에 와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94세, 법랍 82세로 열반에 들었다.
밀양 예림서원의 구영당 건물에 걸려 있는 "禮林書院(예림서원)" 현판이다. 좌측의 관지(款識)를 보면 "崇禎後己酉 賜額(숭정후기유 사액)"이라고 적혀 있는데, 숭정(崇禎)은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장렬제(莊烈帝) 때의 연호로 서기로는 1628년에서 1644년까지이다. 즉 이 현판은 숭정 연호 이후 첫번째 맞이한 기유년은 1669년이므로 현종(顯宗) 10년(1669년)에 사액(賜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