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49 - 화개산 도피안사

徐白(서백) 2010. 10. 30. 10:38

강원도 철원은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문화답사지로 손색이 없다.북으로 조금만 발길을 돌리면 월정역, 노동당사 등 분단의 아픔이 서린 전쟁유적지가 흩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 역사를 들춰볼 수 있는 궁예성지, 도피안사 등 문화유적이 수두룩하다. 처절했던 역사에서 남겨진 것들과 북녘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안보관광지가 된 철원. 그 중심에 자리한 도피안사는 속세를 넘어 이상세계에 도달하는 절집으로, 때 묻은 예토(穢土)가 아닌 지혜의 세계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속세를 넘어 이상세계에 도달하는 절집 도피안사에는 "도피안(到彼岸)"이라는 이름 속에 창건자의 깊은 원력이 서려 있다. 이 절은 865년(경덕왕 5년) 당대의 고승인 도선국사가 1천500여 명의 대중과 함께 철불을 조성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수록된 사적기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러 가던 도중 불상이 없어져 찾았더니, 도피안사 터에 안좌하고 있어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철불은 도피안사가 자리한 화개산이 물위에 떠 있는 연약한 연꽃의 모습이어서 삼층석탑과 함께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새 시대의 도래를 꿈꾸는 민중의 정성이 이적을 보인 것이다. 도선국사는 이 절을 비보사찰(裨補寺刹) 중 하나로 삼았으며, 창건 이후 천년동안 그 명맥을 이어왔다고 하나 자세한 중수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의 절의 내력은 "유점사본말사지"에 이임재(李瀮宰)가 지은 "화개산도피안사중수기(花蓋山到彼岸寺重修記)"에 전하는데, 1898년 봄 큰 화재로 사찰의 모든 건물이 전소되면서 비로자나불좌상이 노천에 노출되었다고 한다. 이에 영주산인(靈珠山人) 월운 스님이 군하(群下)의 유력자인 강대용(姜大容)의 도움으로 법당 3칸을 지은 후 불상을 봉안하고 후불탱을 조성하였으며, 1914년에는 강대용이 화주가 되어 칠성각과 산신각을 중건하였다. 광복 후에는 공산치하에 들어갔다가 6·25전쟁 때 전화로 완전 폐허가 되어 불상 또한 땅에 묻히고 말았다.

 

그 후 민간인통제구역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1953년부터 미 34단이 이곳에 주둔하다가 1957년에는 국군 15사단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9년 어느 날 제15사단 이명재(李明載) 장군의 꿈에 도피안사의 부처님이 나타나, 불상이 땅속에 묻혀 답답하다고 계시하였다.  꿈을 꾼 이튿날 전방 시찰을 나갔던 장군은 갑자기 갈증을 느껴 부근의 한 민가에 들어갔다가 그 집 안주인의 모습이 꿈에 본 여인과 똑같은 것을 보고 안주인에게 현몽한 꿈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장군은 꿈속에 보았던 절터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 여인의 안내를 받아 불타 없어진 도피안사 터를 찾아가서 땅속에 묻혀 있던 철불을 발견하였다.

 

이렇듯 천년 전 도선국사에 의해 조성된 철불은 이명재 장군에게 현몽하여 그 몸을 드러냈고, 고주찬 대대장과 함께 장병들의 손에 의해 도피안사가 재건되었다. 이후 사찰관리는 군에서 군승(軍僧)을 두어 관리하였으며, 1985년 사찰관리권이 민간으로 이관되어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인 신흥사의 말사가 되었다. 이후 근래에는 1986년 주지로 취임한 대원 스님에 의해 1988년 대적광전과 삼성각ㆍ요사채가 신축되었으며, 2002년 주지 도견스님에 의해 사천왕문과 해탈문이 신축되어 현재 가람 불사 중에 있으며, 불자들에게는 영원한 피안의 안식처로서 알려져 있다. 한편 형정구역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450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도피안사의 새로 지어진 해탈문 

 

 

 

 

 

 

 

도피안사 3층석탑은 법당 앞에 건립된 높이 4.1m의 삼층석탑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법당 내부에 봉안된 철불상의 명문에 의해 856년(신라 경문왕 5)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과, 연화좌대를 사용한 것과 전체 형태의 비례감 및 조성수법 등을 통해 신라하대 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이 석탑은 방형으로 된 신라계 일반형 석탑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3층의 석탑이지만 기단은 8각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은 특이한 형태로, 기단은 하대석ㆍ중대석ㆍ상대석을 갖추고 있어 마치 불상의 대좌를 연상케 한다. 하대는 두 장의 석재로 조성했는데, 8각의 각 면에 안상(眼象)이 조각되고 갑석(甲石) 위 괴임대에는 16판의 복련(伏蓮)이 있다. 중대석은 비교적 높게 조성되었으나, 우주를 비롯해 아무런 조식이 없다. 이에 비해 상대는 아랫면에 복련보다 세련된 형태의 16판으로 된 앙련(仰蓮)이 조식되었으며, 윗면에는 굽형 괴임대를 두어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기단부와  달리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평면 방형의 탑신을 유지하며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고 전체적으로 높게 조성되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 2ㆍ3층은 3단으로, 기존의 석탑과 같은 각형 받침이 아니라 끝마무리가 둥근 호형(弧形)인 점이 특이하다. 지붕돌은 조각이 얕아서 다소 무거워 보이나 네 귀퉁이가 날카로운 반전을 보이고 있어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노반석만 남아 있다. 팔각좌대형(八角座臺形)의 기단과 더불어 팔각과 방형이 조화된 구성으로, 명문을 통해 철원지방의 평민에 의해 세워진 원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탑이다. 현재 보물 제 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의 평방 위에는 가야산인(伽倻山人) 인문 송월(印文淞月)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대적광전의 ‘대적광’이란 화엄경의 연화장세계가 대적정의 세계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대적정이란 ‘고요하고 고요하다’는 뜻. 연화장세계는 깨달음, 즉 정각의 세계라는 뜻이다. 대적광전은 연화장 세계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말하며, 부속전각에 모셔질 때는 비로전이라고 하는 편액이 붙여진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법신불인데 법신이란 ‘진리 그자체’라는 뜻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인은 지권인이라고 하는데,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말아 쥐고있다. 가끔 왼손이 위로 가고 오른손이 아래로 가는 경우도 있다.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요, 왼손은 중생세계를 표현하는데,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둘이 아님을 나타내며, 진리의 몸으로 중생세계를 감싸고 있음을 뜻한다.

 

〈보충설명〉그 사찰의 주존불로 모셔질 때는 좌우협시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고 대적광전 혹은 대광명전이라는 편액을 쓰며 선종사찰에서 주로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후불탱화로는 주로 삼신불탱화, 화엄변상도(7처9회의 설법 장면을 표현) 등을 모신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특히 9세기 중엽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해인사 비로자나목불(883년), 보림사 비로자나철불(858년), 도피안사 비로자나철불(865년), 축서사 비로자나석불(867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원래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로는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선종의 삼신설에 따라 아미타불 대신 노사나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건물의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서 도피안사의 주법당이다. 6.25 때 소실된 것을 1959년 주지 김상기(金相基)와 15사단의 장병들이 함께 중건한 것으로, 막돌 바른층쌓기로 다듬은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공포는 주심포형식이나 살미부분은 익공형식을 하고 있으며, 박공부분에는 풍판이 없는 모습이다. 전면 어칸과 협칸에 4분합의 띠살창으로 단장하였다. 대적광전은 원래 화엄경에 나타나는 최고의 부처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전으로, 건물 내부에는 865년에 조성된 철조비로자나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석가모니후불탱이 걸려있으며 건물 뒷벽에는 금동천불좌상이 원불로 모셔져 있다.  또한 1959년에 도피안사의 철불을 발굴한 이명재(李明載) 장군의 초상도 봉안되어 있다.

 

 

 

 

대적광전에 자리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몸체와 대좌가 철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유일의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 9세기에 유행하는 철불은 선종사찰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불상에 명문이 있어 조성연대와 배경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불상이 이 철불이다.

 

'도피안'이란 피안(彼岸), 곧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 곳의 주불이 진리의 상징인 비로자나불로 조성되었음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불상의 뒷면에는 100자의 긴 명문이 있는데, 이를 통해 불상은 865년(신라 경문왕 5년)에 철원지방의 신도 1천500명이 뜻을 모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6·25전쟁 때 도피안사가 폐허화되면서 땅에 묻히고 말았으나, 1959년 전방에 근무하고 있던 이명재(李明載) 장군의 꿈에 현몽으로 계시하여 사지(寺址)를 찾아 땅속에 묻혀 있던 철불을 발견하고 사찰도 복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불상은 갸름한 얼굴에 귀가 짧으며, 나발의 머리에 육계를 명확히 표현하지 않은 모습이다. 이목구비는 모두 작고 섬약하여 민예적인 친밀감이 느껴진다. 신체는 볼륨이 매우 약화되었고, 지권인을 맺은 수인도 아주 작아서 균형을 잃은 모습이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通肩)으로 몸 전체에는 층단식 옷주름이 반복적으로 표현되었다. 마치 얇은 판자를 잇대어 놓은 듯 폭이 일정하고 딱딱한 계단식의 옷주름은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초기의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신체에 비해 대좌는 오히려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드물게 철로 만들어진 형태이다. 대좌는 단정한 3단 구조로, 단판(單瓣) 세겹의 앙련(仰蓮) 밑에 팔각의 중석(中石)이 있고, 그 밑에 귀꽃이 달린 단판의 복련(伏蓮)이 있다. 마치 주변의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은 듯한 사실적인 얼굴의 묘사와 신체비례, 다소 투박한 조각기법에서 지방색을 엿 볼 수 있으며,  현재 국보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건물로 막돌로 쌓아 올린 축대 위에 원형초석과 기둥을 세우고 상부에 익공계 공포를 짜 올린 모습으로 단청이 채색되지 않은 건물이다. 건물 전면은 2ㆍ4분합의 띠살문으로 단장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된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