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사고지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 번지, 오대산사고지(五臺山史庫址) 는 사적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源寶略)"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조선 후기 5대 사고(史庫) 중 하나이다.
"실록(實錄)"은 조선 전기에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1592년)으로 전주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선조 39년(1606년)에 다시 만들어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강화 마니산, 오대산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였다. 그러나 인조 때 이괄의 난(1624년)과 병자호란(1636년)으로 "춘추관본"이 불타 없어졌고, 그 후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에 보관하게 하였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현재 서울대학교에 보관되어 있고,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중 없어졌으며, "오대산본"은 일본에서 거의 불타 없어졌다.
오대산 사고가 있던 곳은 원래 물, 불, 바람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상서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사고를 지을 당시에는 실록각, 선원각, 별관, 그리고 사고를 지키던 수호사찰로 영감사(靈鑑寺)가 있었으며, 참봉 2명과 군인 60명, 승려 20명이 사고를 관리하고 지켰다. 한국전쟁으로 모두 불에 탔으나 1992년에 사각과 선원보각으로 이루어진 사고의 건물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국보 제151-3호, 오대산본(五臺山本) 27책은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서울대학교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책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년)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있는 방대한 역사서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또한 사료의 편찬에 있어서 사관이라는 관직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도 보장되었다. 실록을 편찬하는 작업은 다음 왕이 즉위한 후 실록청을 열고 관계된 관리를 배치하여 펴냈으며, 사초는 임금이라 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하였다. 사료가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실록을 보관하던 창고)에 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지만 20세기 초까지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의 사고에 남아서 전해내려 왔다.
이 오대산본은 27책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 실록은 선조 36년(1603년) 7월부터 39년(1606년) 3월 사이에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만든 4부 중 하나이다. 그 이후 고종 2년(1865년)에 만든 "철종실록"에 이르기까지 실록이 편찬되는 대로 첨가되어 온 것으로 선조 39년(1606년)부터 1910년 일제시대까지 계속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어 왔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일본 동경대학으로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화재로 인해 거의 대부분을 잃었다. 그 중 30책은 동경대학에 보관되어 있으며, 27책만 1932년 5월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에 보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