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야기43 - 내연산 보경사
포항시 북구 송라면 증산리 622번지, 내연산(內延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인 포항 보경사(寶鏡寺)는 신라의 지명(智明) 법사가 602년(진평왕 25년)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지명 법사는 중국 진(陳)에 유학하였는데, 그 때 어느 도인에게서 팔면보경(八面寶鏡)을 전수받으며 이 팔면보경을 동해안의 명산 명당에 묻으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고 이웃 나라의 침입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지명 법사는 귀국하여 이 사실을 진평왕에게 아뢰니 왕은 기뻐하며 지명 법사와 함께 좋은 자리를 찾고자 동해안 포항을 거쳐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멀리 서북쪽으로 오색구름이 덮여 있는 산이 있어 찾아가 보았더니 바로 내연산이었다. 그리고 산 아래 평탄한 곳에 큰 못이 있는데 지명 법사가 보니 바로 그 자리가 명당이었다. 그리하여 그 못을 메우고 팔면보경을 묻어 금당을 세우며 절을 창건하였으며,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은 곳이라 절 이름을 보경사(寶鏡寺)라 하였다.
보경사의 금당탑기에 의하면 또다른 창건 연기설화가 전한다. 신라의 일조(日照) 스님이 중국 당(唐)에 유학 갔다가 귀국할 때였다. 그의 스승 마등(摩謄)과 축법란(竺法蘭) 두 스님이 팔면경(八面鏡)을 내어주며, 동해 끝 남산 밑에 있는 용담호(龍潭湖) 깊은 곳에 이 거울을 묻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이 만대에 번성한다고 하자, 일조 스님이 귀국하여 세웠다고도 한다.
마등과 축법란은 본래 서역(西域)의 승려로서 중국으로 들어올 때 십이면원경(十二面圓鏡)과 팔면원경(八面圓鏡)을 가져왔다. 십이면원경은 낙양의 성곽 바깥에 묻어 절을 세우니, 중국에 올 때 백마에 경전과 보경을 싣고 왔다 하여 백마사(白馬寺)라 했으며, 팔면경은 일조 스님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 왔던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가는 지금 알 수 없다. 창건주와 창건시기가 다르고, 창건의 과정이 조금 틀리고 있다. 그러나 보경사가 보경이라는 청동 거울을 얻어 땅에 묻어 지은 사찰이라는 점, 그리고 이 보경은 곧 중국 또는 인도에서부터 전래한 보배라는 점은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경이란 곧 불법(佛法)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창건 설화는 1792년(정조 16년) 동봉(東峰) 스님이 지은 「보경사사적」에 나온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원진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 1171∼1221년) 스님이 1214년(고종 1년)에 보경사에 주지로 오면서 중창하였다. 이 때 승방 4동과 정문 1칸 등을 중건하고 범종, 경(磬), 법고 등도 새로 구비하였다고 한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시대 1677년(숙종 3년)에 3창을 시작하여 18년만인 1695년에 완공하였다. 이 때 대웅전과 적광전, 영산전 등을 중건하여 삼존불상과 후불탱을 봉안하였고, 그 밖에 팔상전, 명부전을 비롯해서 여러 건물을 중건하였고, 범종 등을 새로 조성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1916년에서 192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설산 장욱(雪山壯旭) 스님이 금당의 계단과 탑을 중수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1922년에 석전 한영(石顚 漢永) 스님이 지은 공덕비에 자세히 나와 있다. 1917년 구태인(具泰仁) 스님이 명부전을 중수하고, 1935년 구태인·윤관하(尹寬河) 두 스님이 대웅전과 상지전(上持殿)을 중수하였다. 최근에는 1977년 벽암 동일(碧巖 東日)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적광전의 삼존불상을 개금하는 등 주석하는 동안 여러 차례 절의 중수를 이루었다.
매표소 앞에 근래에 새로 건립된 일주문이며, 이 문은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 가는 첫 번째 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 풍판을 달았으며, 공포는 다포식이다. “內延山 寶鏡寺”라는 편액은 산명과 사찰명을 밝힌 것이다.
해탈문(解脫門)은 온갖 번뇌와 괴로움을 여의고 윤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아무 거리낌 없이 진리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의 문(門)으로 보통 불이문(不二門)의 다른 이름으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 쓴다.
설산 장욱선사 공덕비각
1916년에서 192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설산 장욱(雪山壯旭) 스님이 금당의 계단과 탑을 중수한 내용 등이 기록된 '설산당장욱선사공덕비'인데, 1922년에 석전 한영(石顚 漢永) 스님이 지은 공덕비라고 한다.
천왕문 또는 사천왕문이라고도 하며, 사찰로 들어가는 2번째 문으로서 건물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천왕문은 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즉 사천왕은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일념(一念)이 숱한 역경에 의해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구도자에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해탈의 경지인 수미산 정상까지 오를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문짝을 고정하기 위해 문짝 양옆으로 세로로 세우는 기둥목을 문설주라 하고. 문설주를 잡아주기 위해 문 위에 가로로 놓이는 것을 문상방, 문아래 가로대는 것은 문하방(문지방)이라 한다. 문설주 밑에는 기둥 밑에 초석을 받치듯이 앞뒤로 짧은 각목을 받치는데 이것을 신방목(信枋木)이라 하는데, 보경사 천왕문의 신방목 끝에는 사자모양을 새겨 놓았다. 사자는 지혜와 용맹을 의미하는데, 사자모양의 신방목은 보경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숙종 34년(1708년)에 중건(重建)하였으며 사천왕상은 1980년에 새로 봉안(奉安)하였다. 향 우측에는 '內延山'이란 산명과 좌측에는 '寶鏡寺'라는 사찰명이 적힌 편액을 걸었고 중앙에 '天王門' 편액이 걸려있다.
동방의 지국천왕은 음악의 신 건달바들의 왕임을 상징하는 비파를 손에 들고 있은데 이곳의 지국천왕은 왼손에 여의주를,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인간의 기쁜 감정과 봄을 관장한다. 선한 자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
남방의 증장천왕은 손에 칼을 들고 있는데 이곳의 증장천왕은 창을 들고 있다. 인간의 사랑 감정과 여름을 관장한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푼다.
서방의 광목천왕은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데 이곳의 광목천왕은 다른 지물을 들고 있다. 인간의 노여움의 감정과 가을을 관장한다.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구도심을 일으키게 한다.
북방의 다문천왕은 손에 보탑(사리기)을 들고 있으며, 인간의 즐거움의 감정과 겨울을 관장한다.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한다. 그리고 사천왕 중의 가장 우두머리 천왕이고,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잘 듣는다하여 多聞이라한다. 또한 사천왕의 발밑에 밟고 있는 악귀를 생령좌, 귀상 또는 괴상이라고 하는데, 가상생물인 생령좌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악(惡)을 형상화 한 것으로, 다름 아닌 내 마음속의 삿된 생각이다.
보경사의 범종각은 2층으로 된 루각(樓閣)인데도 범종각(梵鍾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하층에 범종을 안치하고 2층에는 법고와 목어, 운판을 별도로 안치하였다. 범종은 지옥중생를 제도하기 위해 친다. 새벽에는 28번(수미산을 중심으로 수직적 28천을 의미, 동양적인 사고로는 하늘의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고 함)의 타종을 하는데 천상계인 사천왕천에서(욕계 6천, 색계 18천과 무색계 4천)비상비비상천까지 28천의 모든 하늘나라 중생들을 깨워서,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라는 의미에서 치는데, 한편으로는 인도의 가섭존자에서 중국의 달마대사까지 28대 조사를 위하여 친다는 설도 있다. 저녁에는 육신을 가진 현실의 수행자가 수미산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정상이 도리천이다. 즉 현실의 수행자들이 사는 곳이 도리천을 상징함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의미로 33천(도리천을 중심으로 수평적 33천을 의미)을 상징하는 33번의 종을 친다.
보경사 오층석탑은 1976년에 석탑을 보수하면서 기단석 일부와 4,5층 탑신과 5층 옥개석을 새로 만들어 넣었다.
기단의 네 면에 새겨진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탑신부의 몸돌에 새겨진 우주(隅柱)
1층 탑신석의 양쪽면에 새겨진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비(門扉)
"보경사 오층석탑(寶鏡寺五層石塔)"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이며, 보경사 경내에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고려시대 초기의 석탑이다.
기단의 네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조각하였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우주(隅柱)를 조각하였다. 지붕돌의 옥개받침은 1층과 2층은 4단이고, 3층과 4층, 5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의 전각은 약간 들려있다. 또한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비(門扉)를 탑신석에 섬세하게 새겨넣었다. 탑의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날렵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일명 ‘금당탑(金堂塔)’이라고도 부르는데, "보경사금당탑기(寶鏡寺金堂塔記)"에는,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이 고려 현종 14년(1023년) 3월에 이 탑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보경사에는 본존불을 모신 전각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이 있으면,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적광전(대적광전이라고도 부름)은 없다. 해인사에는 대적광전이 있으나, 대웅전이 없고, 쌍계사에는 대웅전이 있으니까 대적광전이 없는 것처럼 두 전각이 한 사찰에 없는 것이 사찰건축의 기본이다. 그런데 보경사에는 앞에는 적광전이 있고, 적광전 바로 뒤에는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연화장 세계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봉안해 놓은 법당을 적광전이라고 한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법신불인데 법신이란 '진리 그 자체'라는 뜻이다. 적광전(寂光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조선시대 후기의 전각이다. 보경사 금당탑비에 보면 1677년에 금당과 법당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근거해 이 건물을 1677년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곧 금당은 적광전, 법당은 대웅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적광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앞면 어간문(중앙 칸)의 하방(下枋) 양쪽에 있는 동물 형상을 한 신방목(둔테목)
'세상의 번뇌를 끊고 적정(寂靜)한 열반의 경계로 들어가 발휘하는 지혜의 빛이 있는 집'이란 뜻의 적광전 편액
적광전의 공포는 내외 2출목이며, 주두(柱頭) 위쪽을 일반적으로 용두(龍頭)로 장식하는데 이곳 보경사의 적광전에는 용두(龍頭)가 아닌 봉두(鳳頭)로 장식한 것이 특이하다. 또 한가지 이 적광전에서 특이한 점은 기단부 석재가 모두 옥석(玉石)이라는 점인데, 다른 전각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재질이다.
안에는 이 전각의 창건시에 함께 조성한 듯한 비로자나 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협시는 문수와 보현보살이, 후불탱은 1742년(영조 18년)에 조성된 것이다.
대웅전(大雄殿)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데, 보경사 금당탑비를 보면 1677년(숙종 3년)에 법당을 중창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1677년을 이 전각의 건축년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32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안쪽 바닥은 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며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태이다. 가운데칸 뒷부분에는 불단을 마련하여 삼존불상(석가모니불,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을 모셔 놓았다. 삼존상은 대웅전 창건시 조성하였고 후불탱의 삼존불은 석가모니불이 주존불이고 좌우협시는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며 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8대 보살과 가섭과 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 천동, 천녀, 사천왕 등이 시립하고 있는 구도의 탱화로 1778년(정조 2년)에 조성하였다.
대웅전 뒤로 팔상전과 산령각, 원진각, 영산전, 명부전이 나란히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전경
팔상전(八相殿)이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한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 전각을 말한다.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어 영산전이라고도 한다. 팔상전 옆으로 조그마한 산령각이 함께 보인다.
산령각(山靈閣)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20세기 초의 건물이다. 안에는 근대에 조성한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주불은 석가모니불이며, 좌우협시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다.
원진각(圓眞閣)은 원진 국사의 상과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로 7명씩 총15명의 고승 영정을 봉안한 전각으로,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를 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전물이다. 봉안된 영정은 전부 1980년과 1981년 사이에 조성하였다.
영산전과 명부전, 원진국사비각
영산전(靈山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전각으로 조선 후기에 지었다. 영산전은 영산회상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던 광경을 묘사한다. 석가모니부처님과 16나한 모시기도 하고,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팔상전'이라 부르는데 팔상탱화를 봉안하고 존상을 모실 경우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함께 왼쪽에 미륵보살, 오른쪽에 제화갈라보살을 모신다. 그런데 이곳 보경사 영산전에는 조선 후기에 봉안한 금동 석가여래좌상과 최근에 봉안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리고 16나한상 등이 있다.
원진국사 비각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는 고려 중기에 보경사를 중창한 원진 국사(1171∼1221)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하여 1224년(고종 11)에 세운 비로서 1963년 보물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원진국사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석은 귀부(龜趺)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栗首)가 없는 간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신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규수형(圭首形)이라 부르는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비신의 상단에는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을 전자체(篆字體)로 횡서(橫書)하였으며 비문(碑文)은 ‘고려국보경사주지대선사증시(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 원진국사비명병서(圓眞國師碑銘疊序)’로 시작되고 있다.
널찍한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귀부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육각형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신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신의 둘레에는 덩굴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의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년)으로 원진국사가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