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24 - 불령산 청암사

徐白(서백) 2009. 10. 20. 08:21

 

수도산(修道山)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과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경계에 있는 산이며 높이 1,317m이다. 산의 명칭은 참선수도장으로 유명했던 신라말의 수도암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며, 백여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이적이 많다 하여 사람들이 불령산(佛靈山)이라 부른다. 청암사(靑巖寺)는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며, 통일신라시대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청암사 사적(史蹟)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당대의 강백이었던 벽암각성(碧巖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혜원(虛靜慧遠)에게 재건토록 하였는데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건하였다. 그리고 도선국사께서 청암사를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5차례의 중창기을 거치면서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산내 암자로는 백련암과 수도암이 있으며, 특히 수도암은 도선국사께서 청암사 창건 후에 비보사찰로 창건한 절이다.

 

그후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의해 폐비가 되어 서인으로 있을 당시 이곳의 극락전에 기거하면서 기도드렸던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불령산(佛靈山)의 적송산림은 국가의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 말기까지 궁궐의 상궁(尙宮)들이 내려와 기도를 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 고종 9년(1905년), 그 당시의 주지 대운화상이 잠결에 빨간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3년 동안 염불을 해달라며 대시주를 하였는데, 그시주를 받은 것으로 주지스님은 쇠락한 극락전을 다시 중건하고 만일회를 결성하여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청암사 강원의 효시는 조선시대 회암정혜(1685~1741년)스님께서 주석하실 때였는데, 화엄학에 정통한 교학(敎學)의 대가이셨고, 그 당시 운집한 학인 수는 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고봉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과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

강주(講主)인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1987년 3월 25일 청암사 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였으며, 14년에 걸친 불사로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청암사에는 지금 현재 100여명의 비구니스님들이 강원에서 부처님의 경전공부와 함께 수행정진에 매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2007년 4월 18일에는 전문교육기관인 청암사 율원도 개설하였다.

 

 불령산(수도산) 북쪽 기슭의 골짜기를 불령동천(佛靈洞天)이라 한다. 계곡을 따라 울창한 수목과 옥류가 어우러진 불령동천에는 특히 바위가 많으며, 바위마다 사람 이름이나 시를 적어 놓았는데 청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아늑한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깊은 계곡 따라 바위에 새겨진 "청암사 입구"라는 이정표가 길 안내를 했겠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쉽게 갈 수 있어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 당하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청암사 일주문 입구의 오른쪽에 있는 회당과 대운당스님을 기린 회당비각과 대운당비각으로 청암사의 내력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청암사를 있게한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스님이다.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佛靈山靑巖寺(불령산청암사)"라는 편액은 산명과 사찰명을 밝힌 것이다.

 

 일주문의 정면에는 "佛靈山靑巖寺(불령산청암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일주문의 편액은 근세의 명필가였던 성당 김돈희(星堂 金敦熙 1871∼1936년)의 글씨이다.

 

 천왕문 또는 사천왕문이라고도 한다.사찰로 들어가는 두번째 문으로서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 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였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내부에는 각 천왕들을 탱화로 봉안해 놓았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소의 코에 해당한다는 우비천 샘이다.

 

 대운스님이 청암사를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할 때 대시주(大施主)를 한 상궁이 최송설당(崔松雪堂)이다. 김천 출신으로 영친왕의 보모 상궁이였던 최송설당은 영친왕의 생모였던 엄비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많은 재산을 모았는데, 대운스님은 그녀를 통해 많은 궁녀들의 시주를 얻을 수 있었기에 짧은 기간에 큰 불사를 두 차례나 일으킬 수 있었다. 최송설당은 김천중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청암사에 오르기 직전에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는 "崔松雪堂"이란 붉은 글씨가 눈길을 끈다.

 

 극락전 앞에서 바라본 청암사 전경이다.

 

 불전사물이 있는 범종각이다. 범종각 앞의 석조물이 오랜 세월의 흐름을 알고 있는 듯 움크리고 있다.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정법루(正法樓)로, '正法樓" 편액은 성당 김돈희의 글씨다. 

 

 조사스님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인데, "眞影閣" 편액은 성당 김돈희의 글씨이고, 진영각(眞影閣)에는 현재 22분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고, 원본 진영은 직지사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진영각 건물의 한켠에는 청암사의 종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탑은 탑파(塔婆)의 약칭이며, 인도 고대어로는 스투파(Stupa)라고 한다. 이 곳의 탑은 1938년에 조성되었고, 총 높이 4.53미터에 2중 기단에 4층 석탑이지만 원래는 5층으로 추정하며, 지대석 위에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진 기단을 이단으로 쌓았으며, 탱주(撑主)와 우주(隅柱)가 없다. 탑신은 전체적으로 가늘며 길고, 옥개석의 추녀는 귀퉁이에 이르러 추녀밑과 같이 약간 반전되어 있다. 초층의 탑신에는 아치형의 얕은 감실에 사방불을 돋을새김으로 봉안하였며 상륜부는 노반과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대웅(大雄)이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하는데서 유래된 부처님의 덕호이며, 대웅전이란 천지간의 대웅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 놓은 집이란 뜻이다.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도 한다. 대웅전은 통일신라시대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에 의해 처음 창건되었으며, 조선 인조때(1647년) 허정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12년 대운화상에 의해 신축되었고, 건물의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공포는 다포식이고,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현재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의 편액은 근세의 명필가였던 성당 김돈희(星堂 金敦熙 1871~1936년)의 글씨이다. 또한 대구 파계사 진동루에 걸려 있는 행초서체의 '팔공산 파계사" 편액도 성당이 쓴 글씨이다. 

 

                        

 부처님 전에 공양물을 올리기 위해 법당에 드나들 때 공양물을 조심스럽게 잠시 올려 놓는 받침대인데,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한층 돋보이는 것으로 간혹 오래된 절집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시설물이다. 기둥의 耀大天界(요대천계)는 '크게 빛나는 하늘 위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법당을 들어서는 순간 그곳이 바로 불국토의 세계라는 것을 일러주는 뜻이 아닐까 추측한다.

 

대웅전의 주불은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고, 수인은 선정인이다. 얼굴은 약간 도톰하고 좁은 어깨에 통견이고, 육계는 없고 계주가 큼직하게 마련되어 있고, 진홍빛의 가사 안자락의 표현 등이 청나라 말기의 중국 불상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이 불상은 1921년에 대운화상이 중국 항주의 영은사(靈隱寺)에서 조성해와 이 곳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본존불 좌우의 협시보살은 없다. 후불탱화는 부처님 봉안후에 제작된 것이며, 이혜고, 김계은, 홍한곡 등의 금어(金魚)들이 그린 것이다. 협시로는 부처님의 12제자와 8대보살, 사천왕 등의 모습들이며 당시의 대표적인 불화이다.

 

 연화대좌에 정좌하고 계시는 부처님을 청용(靑龍)과 황용(黃龍)이 좌우에서 옹호하고 있는데, 수미단(불단)의 이런 모습은 보기 드문 예이다.

 

 

 대웅전 양쪽의 대들보 위에도 황용과 청용이 익살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용이 물을 관장하며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목조건물에서 자주 일어날 수 있는 화재(火災)로 부터 대웅전을 보호하기 위한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신중단의 신중탱화는 동진보살이나 대범천왕, 제석천왕 등의 신중을 모신 탱화를 말한다. 신중은 부처님께 귀의하여 수행정진하면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불교에서 신의 수는 104분(104位)이라고 하여 신중탱화 속에는 104분의 신중이 모두 모셔져 있지만, 작은 탱화에는 줄여서 대표적으로 몇 위만 모시고 있다.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을 향해 삼배의 절을 올리고, 신중단에도 삼 배의 절을 하는데 그 이유는 '이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이니 지켜 주십시오'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찰에서 예불이나 법회시에 반야심경을 신중단을 향해 독경(讀經)하는 이유도 '이사람은 반야심경을 독경하는 불자이니 잘 지켜 주십시오'하는 마음으로 신중단을 향해서 독경을 한다고 한다.

 

 대웅전에 봉안된 산신탱이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민간에 널리 신앙되었던 토속신이다. 산령각은 우리나라의 토속신인 산신과 호랑이를 봉안한 곳으로 산신각이라고도 한다. 불교에 수용되면서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신이 되여 사찰의 제일 위쪽에 위치한다.

 

 대웅전에 봉안된 칠성탱이다. 칠성탱은 하늘의 별인 북두칠성이 하늘의 일월성진(日月星辰)을 다스리고 천재지변을 통솔하는 주제신(主帝神)으로 승격하여 신으로 숭배된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부처님으로 승격시켜 치성광여래를 주존으로 칠성을 그림으로 도상화한 것이다.

 

 

 육화료(六和寮)란 편액이 붙어 있는 건물로서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육화료는 불교의 진리를 깨치고자하는 수행자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켜야할 규범과 질서가 있다. 즉 수행자들이 서로 친절하고 화합하고 경애하는 여섯가지 법으로서 身, 口, 意, 戒, 見, 利의 화합을 통한 승가의 실천 내용을 말한다.

 

 극락전 편액은 "光武十年丙午四月日"로 적혀있는데, 이는 1906년 병오년 4월에 쓴 글씨이다. 광무 연호는 1897년(고종 34년)부터 쓰기 시작하여1907년(순종 원년)까지 사용했다.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의해 폐비되어 서인으로 있을 당시 이곳의 극락전에 기거하면서 기도드렸던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조선시대 말기까지 궁궐의 상궁(尙宮)들이 내려와 기도를 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 고종 9년(1905년), 그 당시의 주지 대운화상이 잠결에 빨간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3년 동안 염불을 해달라며 대시주를 하였는데, 그시주를 받은 것으로 주지스님은 쇠락한 극락전을 다시 중건하고 만일회를 결성하여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보광전 편액에 "隆熙二年 十月日"이라고 음각되어 있는데, 이는 1908년(대한제국, 순종 2년) 10월을 나타낸다. 隆熙 연호는 1907년(순종 원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1910년(순종 4년)까지 사용했다. 

 

 보광전(普光殿)은 현재 경북 문화재 자료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물의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이고, 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공포를 얹은 다포식 건물이다.

 

보광전이란 당호를 가진 법당은 우리나라에서 그 예가 드물다.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보광전(普光殿)은 원래 고대 중인도 마가다국 보리도량에 있었다고 하는 불전의 이름이다. 부처님께서 지상과 천상을 오가며 화엄경을 설하는 아홉 번의 법회(7처9회) 가운데 2회, 7회, 8회가 보광법당회로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보광전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7처9회의 장소 : 1회 적멸도랼, 2회 보광법당회, 3회 도리천회, 4회 야마천회, 5회 도솔천회, 6회 타화천회, 7회 보광법당중회, 8회 보광법당삼회, 9회 서다림회)

보광전은 숙종 15년(1689년) 인현왕후가 장희빈 때문에 폐위되어 이곳 극락전에 은거하였는데, 이때 극락전 서쪽에 인현왕후의 복위를 빌기위해 세웠다고 하며, 그 뒤 인현왕후는 1694년에 복위되고 장희빈은 몰락하였다. 광무 9년(1905년)에 다시 세웠으나 1911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의 42수 관음보살은 도난을 당하였고, 현재의 42수 관음보살은 근세에 새로 조성하여 봉안된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일반적으로 성(聖), 천수천안(千手天眼), 마두(馬頭), 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 준제(准提) 혹은 불공견색의 6관음을 말하며, 그 중에 성관음이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탱화로 모실때에는 1천개의 눈과 1천개의 손을 모두 묘사하지만, 조각상으로 모실땐 보통 42수(手)만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42수 중 합장한 두 손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외의 40수는 각각의 손이 25유의 중생을 제도하므로 40×25=1,000手가 된다. 여기서 25유는 지옥부터 천상까지의 육도중생을 25계층으로 나타낸 것이다.

 

  보광전 앞의 마당에 놓여 있는 배례석(拜禮石)은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된다. 윗면에는 두 개의 연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부도군에는 조선시대 정혜선사의 부도와 고봉스님의 부도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의 부도가 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옛날 청암사에 재물이 넘쳐나 스님들이 수행하는데 걸림이 된다고 하여 그 재운(財運)을 누르기 위해 지금의 자리에 부도군을 세웠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