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야기

사찰이야기11 - 화왕산 관룡사

徐白(서백) 2009. 4. 25. 11:04

 

창녕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화왕산(火旺山) 관룡사(觀龍寺)는 신라시대 때 창건되어, 원효대사가 제자 천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한 8대 사찰 중의 하나로서 많은 문화재와 경관이 수려한 사찰로 널리 알려졌지만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관룡사의 ‘관룡(觀龍)’은 사적기에 화왕산 정상의 삼지(三池)에 숨어 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절이 창건될 때 구름 위로 승천하는 것을 많은 무리들이 목격하였다 하여 ‘용을 바라본다는’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라 전한다. 초창시기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약사전에서 발견된 묵서에 ‘영화오년기유(永和午年己酉)’라고 기록하였으며, 절에 비장된 사기(寺記)에도 신라 349년 흘해왕 40년(訖解王 : 신라 16대 임금)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가야(伽倻)에 전해졌다는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반면 『창녕군지(昌寧郡誌)』에 따르면, 583년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초창하여 신라의 8대사찰로서 원효대사가 제자 1천여 명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법한 도량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오더니, 화왕산 마루인 월영삼지로부터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이 보이므로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 역시 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일반적으로 관룡사의 창건을 583년(신라 진평왕 5)으로 보고 있다.  이후 748년(경덕왕 7)에 추담(秋潭)이 중건하였으며,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519호)과 관룡사 부도(유형문화재 제 19호) 등 고려시대 유물들이 전하여 고려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401년(태종 원년) 대웅전이 중수되고, 1507년(중종 2) 약사전이 중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당우가 소실되었다. 사적기에 의하면, “불전(佛殿)ㆍ승사(僧舍) 등이 독봉(毒蜂)의 피해 불에 타버리고 …유일하게 약사전만 불에 그을 린 흔적이 있는 채로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경내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이후 관룡사는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된 사역을 17세기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게 된다. 1617년(광해군 9) 영운스님의 대웅전 재건을 시작으로 1619년(광해군 11) 향적전을 창건하고, 1622년(광해군 14) 금당을 건립하는 등 전각과 승사를 중창하여 17세기 관룡사는 13개의 건물 및 6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로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그러나 1704년(숙종 30) 여름의 대홍수로 금당과 부도 등이 유실되고 승려 22명이 익사당하는 참변을 당한 뒤 1712년(숙종 38)에 대웅전과 기타 당우들이 재건되는 중창이 따른다. 18세기 사적기에 기록된 관룡사의 중창은 대규모의 것으로, 1712년 대웅전의 중수를 시작으로 수년의 불사로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학령ㆍ홍순 스님이 1749년(영조 25)에 3중창하여 옛 가람의 사세를 유지하였으나, 19세기에 가람이 쇠락하여 경내에 수많은 전각과 요사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다시 한번 중창하여 1883년(순조 33)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1882년(고종 19)에 여러 건물을 중수함으로써 옛 가람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래에는 6.25로 화왕산 일대가 공산군의 집결지가 되면서 팔상전이 소실되고 대웅전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큰 피해는 입지 않아 지금의 가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며,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관룡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신돈이 태여나고 자랐다는 옥천사지가 있는데,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있어 고려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위의 것은 석등의 하대석으로 추정된다.

 

 

  

창녕 화왕산 관룡사 입구에 옥천사지로 알려진 절터가 있는데, 이 절터는 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되고, 이곳에서 신돈이 태여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돈의 법명은 편조(遍照)이고 그의 아버지는 알려진 바 없으며 그의 어머니는 계성현(지금의 창녕) 옥천사의 노비였다고 한다. 신돈에 관한 내용은 고려사 열전편에 "어미가 천하므로 그 무리에 참여하지 못하고 늘 산방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돈은 후에 권력을 휘두르며 고려사회 개혁작업에 나서게 되는데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양민에게 돌려주고, 강압에 의해 노비가 된 백성들을 원래 신분으로 회복시켜 준다. 그러나 신돈의 개혁은 공민왕 18년(1370년) 왕이 친정에 나섬으로써 실패로 끝난다.

신돈이 태여나고 자랐다는 옥천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돈이 처형되자마자 이 절도 함께 폐사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절의 규모가 매우 큰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넓은 터에는 현재도 여러 석재들이 발견되고 있다.

 

 

관룡사 초입에 있는 2구의 석장생으로 이곳에서부터 경내를 표시하는 석표, 수문장의 구실을 한다. 화강석을 거칠게 다듬어 남녀상을 각각 새겨 넣은 모습으로, 경남민속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장승은 상투를 얹은 듯한 둥근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으며, 툭 튀어나온 커다란 눈, 콧구멍이 뚫려있는 주먹코가 특징이다. 여장승은 얕은 상투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남장승과는 달리 관모가 없으며, 남장승에 비해 몸체가 훨씬 육중하다. 전반적으로 육중한 몸매로 인해 안정감을 주며, 사찰의 경계표시와 수문신의 상징적 특징인 왕방울 눈과 주먹코, 아래로 뚫린 콧구멍, 방방한 턱 등 한국장생의 독특한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다. 제작연대는 1773년(영조 49)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룡사 초입에 계곡 축대 아래 석종형 부도 2기가 서 있다. 관룡사부도 중 그 시기가 가장 떨어지는 근세의 부도이다.

 

 

 

관룡사로 오르는 돌담길에는 축성시기를 알 수 없는 석문이 하나 있다. 사실상 관룡사의 일주문으로 불리는 아담한 석문이다. 조성시기는 17세기 명부전과 칠성각이 조성될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관룡산의 진산인 화왕산 산성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이외 석문 옆에는 4기의 비가 있다. 1938년에 세워진 전현풍군수 하재명 숙부인김녕김씨 도장석축유공비(前玄風郡守河在鳴 淑夫人金寧金氏 道場石築有功碑)를 비롯하여 환몽화상유공비(幻夢和尙有功碑), 1985년과 1995년에 세워진 전기불사공덕비(電氣佛事功德碑)ㆍ진관평산포수군만호자 불사공덕비(鎭管平山浦水軍萬戶者 佛事功德碑) 등 관룡사 중창과 관련된 불사 공덕비이다.

 

 

일주문의 정면에는 '화왕산 관룡사(火旺山觀龍寺)'라는 글씨가 씌여진 현판이 걸려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초입(初入)의 문으로 보통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일주문이라 한다. 그러나 요즘은 흔히 사찰의 첫 문을 가리켜 사용되고 있다.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건물은 어칸 중앙의 양 측면에 기둥을 세워 대문을 달고, 어칸을 통해 출입문을 만든 모습으로, 내부에는 사천왕탱을 모신 감실형의 벽체가 남아 있다.  

 

 

범종루 건물 내부에는 1995년에 노천월하(老天月下)스님이 증명하고, 주지 지묵항조(至?恒照) 화상이 조성한 '반야대범종(般若大梵鐘)'이 봉안되어 있다.

 

 

범종루에는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높이 122㎝, 폭 78㎝의 목조사자고대(木造獅子鼓臺)가 있다.

 

 

대웅전 맞은편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건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1634년(인조 12)에 초창된 후 1763년(영조 39)에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초창 당시 극락전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현재 극락전은 현존하지 않는다. 이후 원음각은 1830년(순조 30)에 중수되었고, 최근 1994년 해체 보수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대웅전은 보물 제212호로 지정된 관룡사의 주법당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다포계 팔작건물이다. 1965년 8월 해체보수공사 때 어칸 마루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401년(태종 원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년(광해군 9)에 중창하고 1749년(영조 25)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공포는 어칸에 둘, 퇴칸에 하나씩 놓았으며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다포식을 취하고 있다.

 

 

중앙에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이 좌우에는 설법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뒤에는 석가모니후불탱이 걸려 있다. 이 삼존불은 수인(手印)만 다를 뿐 사각형의 얼굴로 머리의 육계에는 계주가 장식되어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通肩)의 주름은 형식적이면서 다소 경직되었다. 목조삼존상은 17세기 중반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불단에 조각된 음악을 연주하는 비천상

 

 

대웅전 불단에 사악한 자를 물리치고 법당을 보호한다는 귀면상이 투박스럽게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 공포는 내외부 모두 2출목이며, 출목 바로 위의 살미첨자의 끝은 삼각형이다. 쇠서는 짧아서 건실한  멋을 느끼게 한다.

 

 

칠성각은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로 관룡사 연혁에 따르면 1882년(고종 19)에 건립된 것이다. 내부에는 불단을 가설하여 독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건물 삼면에는 16나한도를 벽화로 그려 넣었다.

 

 

불단의 중앙에 모셔진 석가불좌상은 완만한 상호(相好)로 어깨까지 귀가 늘어져 있으며, 한 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법의(法衣)를 걸쳤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보관에 화불(化佛)이 새겨진 관음보살과 정병이 새겨진 대세지보살이다. 불단의 좌우로는 16나한상들이 모셔져 있다.

 

응진전 건물의 공포는 2익공 양식으로, 초익공과 이익공은 꽃새김으로 조각한 수서형이고 보머리는 봉두를 조각하여 달았다.

 

 

 

 

 

 

응진전 외벽에 그려진 16나한도

 

 

명부의 세계와 관련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인왕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을 이른다. 이러한 명부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 크게 유행하여 대중에게 인기가 높다.

 

지장보살은 원래 인도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한 보살이다. 이 보살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등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운 분이다. 지장보살상은 깍은 머리에 스님 모습으로 결가부좌하고 설법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좌우에는 젊은 수도승인 도명존자(道明尊子)와 문인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두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협시하고 있다.

 

                     

 

 

 

약사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를 바닥돌 삼아 2층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하층기단은 면석 가운데 우주를 조각하고, 우주 좌우로 얇고 넓은 안상(眼象)을 새겨 넣었으며 상층기단 역시 네 모서리와 면 가운데에 탱주와 우주를 조각하였다. 기단 위의 탑신과 옥개는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한 것으로 석탑의 규모에 적합한 비례감을 지니고 있으며, 옥개는 층급받침을 3단으로 간략화하고 낙수면의 끝을 반전시킨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양식과 각부의 수법은 신라석탑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규모가 약 2m 높이로 줄어들고 각부의 양식수법이 간략ㆍ섬약해져 조성시기를 고려시대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맛배지붕에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된 소불당(小佛堂)의 조선초기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祖師堂)이나 송광사 약사전(松廣寺藥師殿)이 팔작지붕의 다포계 건축임에 비해, 주심포 계통의 맛배건물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전돌을 깔고 그 중앙에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였다. 관룡사 약사전은 몇 안되는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하여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 보물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으로 절의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용선대(龍船臺)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본떠 만든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불상은 팔각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선각(線刻)으로 나발이 표현된 큼직한 육계와 중앙계주가 있고, 비만한 얼굴에 비해 작은 입, 뚜렷한 턱의 윤곽선, 굵은 띠주름의 삼도(三道) 등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천의를 걸친 통견으로, 옷주름은 얕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의 변형된 모습으로 왼손 위에는 약기(藥器)가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신체의 세부표현 등에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과 흡사한 모습이다. 현재 보물 5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상ㆍ중ㆍ하대를 모두 갖춘 팔각대좌로, 중대에 귀갑문(龜甲紋)이 평면 처리되어 있으며, 상대에 단판 연화문을 조각하고 있다. 

 

                     

 

 

 

 

특히 약사전은 절을 하기에도 비좁은 전각이지만, 내부 벽면 곳곳에 아기자기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참배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창방 위의 가로로 긴 화면에는 4면을 돌며 불좌상이 정연히 그려져 있다. 모두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지고 연화좌에 앉아 합장하고 있다. 광배 옆에는 각 상마다 명호가 기록되어 있는데, 53불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53불 사상은 대승불교의 다불(多佛)사상 가운데 천불사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많이 신앙되는 것이다. "관약왕약상이보살경"에 따르면 53불을 지심으로 경례하는 사람은 사중오역(四重五逆) 등의 죄가 모두 청정해진다고 했다. 창방 위의 53불도는 세련된 필치와 채색에 명호가 기록되어 있어 사찰벽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건물 내부의 3면에 다양한 벽화가 채색되어 있는데, 세 벽면을 병풍처럼 둘러가며 묘사된 화조화(花鳥畵)는 한 벽면을 4면으로 구획하여 모두 12면에 그려져 있다. 흔히 고승들의 설화나 불보살을 그리는 여느 사찰들의 전각벽화와는 달리 조선후기 궁중의 장식화나 민화로 유행한 꽃과 새의 그림인 화조화를 그려 놓은 예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수묵 위주의 꽃과 새, 나비와 학이 노니는 정경을 그렸는데 각기 다른 주제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군자와 매화, 그리고 국화와 포도, 연꽃과 난초가 피어 있는 벽화는 다소 거친 필치와 여유있는 공간구성, 문인취향의 수묵 등이 조선후기의 화조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약사전 외부 후벽에 그려진 벽화

 

 

순천 송광사에 가면 '비사리구시'라고 불리는 배 모양의 커다란 나무 밥통이 있는데, 이처럼 커다란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것을 구시라고 한다. 관룡사의 구시는 현재 대웅전 옆에 있다.

 

 

 

                     

 

 

용선대에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불경(佛經)에 의하여 화왕산 용(龍)의 기염(氣焰.불을 당기는 기운)을 다스리려는 목적으로 조성된 불상이라는 것이다. 석가여래좌상이 안존되어 있는 언덕을 용선대라고 하는데, 이 곳에 오르면 용을 타고 반야세계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 들며, 여기서 바라보는 풍광도 역시 매우 뛰어나다. 불상은 팔각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광배는 결실되었으며, 현재 동향하고 있다. 석굴암의 본존과 흡사한 양식을 갖추었으며,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가 높게 솟아 있고 방형(方形)에 가까운 풍만한 상호에 선명한 이목구비, 단아한 인상, 미소를 띤 표정에서는 자비로운 불심(佛心)이 느껴진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은 몸에 밀착되어 사실감을 더해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팔각의 상ㆍ중ㆍ하대를 갖춘 연화대좌로 반구형(半球形)의 상대석은 연꽃을 새겼고,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4각의 받침 위에 중판의 연화문을 새겨 넣었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경의 불상양식으로 추정하여 왔으나 최근 조성연도가 722년경(신라 성덕왕대)으로 확인돼 세간에 알려졌다. 명문을 통해 조성연대가 확인된 불상이 매우 드문 현실에서, 용선대 부처님의 법력에 새삼 고개 숙여진다.  현재 보물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명문(銘文) 발견

용선대에 있는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95호)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722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불상의 팔각형 좌대(座臺) 한쪽 측면에서 불상 제작 연대를 나타낼 가능성이 큰 명문(銘文.새김글자)이 발견되어,  현지 조사를 통해 명문을 확인하면서 드러났다.

명문은 세 줄에 걸쳐 '開元十../月卄日(?)../成內..'이라는 글자로 잠정 판독됐고, 조사단이 제공한 사진으로 정밀 판독을 시도한 한국서예사 전공 손환일 박사는 '開元十../月卄五../成明..'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나머지 글자는 마모가 심해 전체적인 맥락을 잡기는 힘들지만 "개원 10년(722년)..월 25일에..(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개원(開元)은 당나라 현종 때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서기 722년이다.
 

 

용선대에서 내려다 본 관룡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