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야기

서백(김춘식)의 사찰이야기194 - 벼랑 위에 앉아 있는 팔공산 중암암

徐白(서백) 2020. 12. 27. 14:19

영천 은해사(銀海寺)의 산내암자인 중암암(中巖庵)은 팔공산 줄기 해발 780m의 높이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 위의 암자이다. 834(흥덕왕 9)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 그 뒤 꾸준히 수도승들의 수행처로 법등을 이어 오다가, 1834(순조 34)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요사채, 객사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32호 은해사중암암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주변에는 삼인암(三印巖)과 건들바위, 장군수(將軍水), 만년송 등이 있다.

中岳第一祈禱道場(중악제일기도도량)이라고 적힌 돌팻말 - 중악(中岳)은 나라에서 해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라의 5악으로 꼽히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팔공산을 지칭한다. 
삼성각과 관음전 편액이 걸린 당우
중암암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돌구멍 절'로 더 잘알려진 암자의 명칭처럼 작은 돌 틈을 지나면 벼랑 위에 앉은 작은 암자를 만날 수 있다.  
돌구멍을 통과한 후 뒤돌아본 모습
벼랑 위의 비좁은 공간에 건립된 대웅전

 

대웅전 바로 아래에 위치한 요사채도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다.
대웅전에 모셔진 본존불(석가모니불) / 후불탱화의 주존은 아미타불이며 좌우협시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시립하고, 바깥쪽으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보살로 위치하고 있다. 또한 아미타불의 두광 좌우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모셔져 있다. 
대웅전 동측벽에 봉안된 신중탱
대웅전 서측벽에 모셔진 탱화 - 창건주 심지대사와 김유신의 설화가 깃든 탱화인듯~?
용왕각에 모셔진 용왕의 모습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따른 석탑으로, 높이는 3m이다. 기단은 2층으로, 하대석은 4매의 면석으로 결구했고, 그 위에 하층 기단 갑석을 올렸다.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갑석은 3매석으로 결구되어 있으며, 상면에는 상층기단 면석을 받기 위한 1단의 괴임이 각출되어 있다. 상층기단은 4매의 면석으로 결구했고, 그 위에 상대갑석을 얹었다. 각 면석에는 하대면석처럼 중앙에 탱주 1개와 모서리에 우주를 각출했다. 탑신은 모두 입방체로서 층위가 올라갈수록 높이가 낮아지는 것 외에는 동일한 양식이다.
1층 탑신은 입방체의 단석(單石)으로 네 모서리에 우주를 각출하였으며, 옥개석은 모두 낙수면의 경사가 심하고 우동과 전각의 반전이 심한 편이다. 모두 옥개받침을 두고 상면에 괴임을 각출했는데, 옥개받침은 4단에서 3단으로 줄어든다. 1층 옥개석 받침은 4단, 괴임 1단을 각출했으며, 2층 옥개석 받침은 3단, 괴임 1단을 각출했으며, 3층 옥개석 받침은 3단, 괴임 1단을 각출했고, 이 옥개에 상면의 괴임에 이어 방형의 노반까지를 한 돌로 만들었다. 노반 위에 보륜이 얹혀 있으며, 반구형으로 4엽의 복련을 새긴 듯하지만, 마모가 심해 확인이 어렵다. 가운데에는 찰주공이 노반까지 관통하고 있다.
극락굴의 한 부분 모습 - 삼층석탑을 지나면 극락굴이다. 아주 좁은 공간이라서 드나들기 힘든 굴이다. 원효스님이 이 굴에서 ‘화엄경 약찬게를 외우다 화강삼매에 들어 불빛을 발산했더니 그 힘으로 바위가 갈라지고 의문이 풀려 화엄경을 완성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말기 영파스님이 어느 여름날 이 굴에서 정진하다가 삼매에 들었고, 한편 밤이 늦도록 스님이 오지 않아 큰 절 대중들이 모두 찾으려고 나와보니 굴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감복하여 스님들이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도량에서 공부를 하거나 청정히 계를 지키고 기도하면 잘 이루어진다고 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알면 몸이 아무리 커도 좁은 굴을 통과 못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다. 
삼인암(三印岩) 설화 - 구전에 의하면 어느해 겨울 큰 눈이 내렸다. 팔공산 주위가 온통 눈으로 뒤덮혀 산길은 막혀버리고 찾아오는 신도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쌀독이 비었다. 당장 끼니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방이 눈이라 움직일 수 없으니, 도리 없이 굶어야 했다. 어느 날 저녁, 법당 밖을 나서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마당에 척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스님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치자, 호랑이는 스님의 옷자락을 물고 당겼다. 마치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호랑이를 따라갔다. 법당 동쪽으로 조금 가서는 호랑이는 한 곳을 가리키고는 숲으로 사라져버렸다. 큰 바위 앞에 뭔가가 보였다. 쌀이었다. 딱 하루 먹을 분량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쌀은 손가락 크기로 난 바위의 구멍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다음 날 그곳에 가니 역시 구멍에서 하루 분의 쌀이 흘러나와 있었다. 매일 하루 분량의 쌀이 나왔다.
드디어 겨울 지나가고 봄이 왔다. 하루는 남루한 차림의 객승이 찾아왔다. 식량이 매일 하루분밖에 안 되지만, 나누어 먹으면 되겠지 하고 바위 있는 데 가니 쌀구멍에서는 딱 두 사람분의 쌀이 나와 있었다. 사람 수에 맞추어 쌀이 나오는 것이었다. 객승이 보고는 욕심을 냈다. “이 절을 뺏으면 평생 먹을 걱정은 없겠네.” 그는 산적들을 찾아가 절을 뺏을 수 있게 도와 달라했다. 산적들이 원주스님을 묶어놓고 목을 치려는 순간에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 객승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그리고 집채만 한 바위덩이가 산적들을 내리덮을 듯 공중으로 떴다. 원주 스님은 두 손으로 바위를 받아 서너 칸 뒤로 물러 놓았다. 산적들은 벌벌 떨며 참회를 했다. 원주 스님이 받아서 내려놓은 그 바위가 바로 삼인암(三印岩)이라 한다. 

 

★ 해우소 이야기

어느 선원에서 통도사, 해인사, 돌구멍 절 스님이 함께 정진했다. 각자 자신의 절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을 했다. 통도사는 대찰 답게 법당 문이 워낙 커서 한번 문을 열고 닫으면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한 말 석 되나 떨어진다고 했다. 해인사 스님은 스님들이 많아 공양간 솥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쑤면 배를 타고 다니며 저어야 한다고 허풍을 떨었다.

바위 틈에 매달린 듯 작은 암자에 불과한 돌구멍 절에서 온 스님은 절이 크지도 않고 스님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다른 자랑거리를 내놓았다. 해우소가 하도 깊어서 정월 초하루 날 볼 일을 보고 나오면 섣달 그믐날 떨어진다며 자랑했다. 천길 바위 틈에 만든 해우소가 그만큼 높은데 있다는 것을 장난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건들바위 설화

옛날 한 승려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큰 바위가 암자로 굴러 떨어지려고 하므로 급히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자 바위가 떠올라 훨씬 뒤의 안전한 자리로 옮겨 앉았다고 한다. , 장군수는 김유신(金庾信)17세 때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물맛이 매우 뛰어난 석간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