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39 - 천년의 시간을 머금은 채 침묵하고 있는 무장사지

徐白(서백) 2015. 9. 8. 11:33

 

 

무장사지는 우리나라 3천여 개의 절터 중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준다는 곳인데, 이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보문관광단지를 지나 좁은 길따라 한참을 가면 암곡동 마을이 나오고, 그곳에 바로 무장사지 제1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서 약 3km의 가늘고 길게 꼬불거리며 이어지는 길을 따라 열 번에 걸쳐 계곡을 왔다갔다 건너서 눈 앞의 낮은 언덕에 올라서면, 산 좌우로 계곡물이 흘러 합쳐진 둔덕에 절을 세웠던 무장사지이다. 맨 앞에 3층 석탑이 남아 있고, 중간에는 금당터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아미타조상 사적비가 놓여있다.

 

무장사(䥐藏寺)라는 이름은 신라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전쟁의 상징인 투구와 병기를 묻었다는 뜻으로 투구 감출 의 무장사란 이름이 붙여졌다. 절 이름에서 보듯이 무장사지(䥐藏寺址)는 평화와 화해의 상징이며, 또한 전장에서 쓰러져 간 병사들의 깊은 슬픔을 보듬어 녹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병기가 필요없는 평화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의지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무장사지는 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그의 숙부인 파진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며, 아미타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1760(영조 36) 경주 부윤이었던 이계 홍양호(1724~1802)에 의해서이다. 그가 경주 부윤을 지낼 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맷돌로 콩을 갈고 있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그 맷돌은 예삿돌이 아닌 비석의 파편이었다. 그가 아전을 시켜 가져온 탁본을 보고 무장사 비편을 최초로 밝혔다. 그 뒤 금석학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가 1817(순조 17) 재차 밝혔다.

 

그리고 폐사지에서 돋보이는 스타는 단연 석탑이다. 천년을 훌쩍 뛰어 넘는 세월 동안 중생들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감싸 안으며 지나온 수많은 시간을 머금은 채 침묵하고 있는 탑은 지금도 사람 하나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자연과 함께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다.삼국유사에서도 그 지세에 대해 "그곳의 깊은 골짜기는 마치 산을 깎아 세운 듯 몹시 가파르고, 절이 어둡고 깊숙한 곳에 있어 저절로 텅 비고 고결한 기운이 돌아, 참으로 마음이 안식되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다"고 하였다.

 

칠불산악회 회원들이 산행 시작 전에 무장사지 제1주차장에서 인증샷  

 

 

경주국립공원관리공단 관리사무소의 요청에 의해 다시 한 번 인증샷 찰깍!  

 

암곡마을 주차장에서 무장사지를 가기 위해서는 이런 개울을 십여 차례 왔다갔다 건너 다니면서 약 2.5km를 걸어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무 데크다리를 건너 100여 미터를 올라가면 산 좌우로 게곡물이 흘러 합쳐진 둔덕에 무장사지가 나타난다.

 

좌측 언덕 위에는 '아미타불 조상비'가 서 있는 금당의 뒤쪽에 해당하는 곳이고, 우측 평지는 무장사의 금당이 자리했던 위치이다.

 

(사진-1) 금당터에서 내려다 본 삼층석탑의 모습 

 

(사진-2)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삼층석탑의 모습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매장하고 병기가 필요없는 평화스러운 시대를 열겠다는 태종무열왕의 결연한 의지가 이 절을 창건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또한 절 안에 3층석탑을 세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 2개를 새겼고, 윗층 기단은 안상(眼象)을 각 면에 2개씩 조각하였다.

  

절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전이고 지금은 깊은 산골에 삼층석탑만이 외로이 서 있다. 심산유곡에 홀로 서 있는 탓인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조금 높은 편이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기의 줄어든 정도가 적당하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며,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있다.

   

1층 몸돌이 조금 높지만 간략화가 심하지 않고, 기단부에 새겨둔 안상은 양식상 시대가 내려옴을 의미하므로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무너진 채 깨어져 있었던 것을 1963년 일부를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 

 

무장사의 금당이 위치했던 장소

    

아미타불 조상비가 있는 금당 뒤쪽 언덕 위의 모습  

 

파괴되었던 비신을 새로 만들어 세운 아미타불 조상비의 모습 

  

아미타불 조상비를 떠받들고 있는 쌍 귀부(龜趺)의 좌측 거북 머리 

 

쌍 귀부의 좌우측 거북의 발 모습으로, 발가락의 조각이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다.   

 

목이 잘린 우측 거북의 모습 

 

쌍 귀부의 뒷 모습으로, 특이한 것은 거북의 발가락이 5개가 아닌 4개로 표현되어 있다.

 

(보충 설명) 거북이 발가락이 몇 개냐고 물으면 황당하게 여길것이다. 참고로 악어는 앞발가락이 다섯 개, 뒷발가락이 네 개다. 또한 쥐와 참개구리는 앞발가락이 네 개, 뒷발가락이 다섯 개다. 하지만 거북 발가락은 앞뒤 모두 다섯 개다. 그런데 경주 태종무열왕릉에 있는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龜趺)에는 발가락이 악어처럼 앞발은 다섯 개, 뒷발은 네 개다.

 

이를 두고 문화해설사 설명은 거북이 힘차게 나갈 때 뒷발의 엄지발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어 힘을 주는 모습이라고 한다. 하지만 거북은 지금 물속에 있는 게 아니라 뭍에 있으니까 왠지 설득력이 약하다.

 

그런데 거북의 등에 무거운 물건을 얹으면 거북은 뒷발의 발가락 하나를 안으로 집어넣고 버티게 된다. 무거운 돌비석을 등에 진 거북은 자연히 발가락 하나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천오백년 전 신라 석공들이 이런 비밀을 알고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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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등에 얹혀진 장방형의 비석 받침대 네 면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점이 독특하다.   

 

아미타불 조상비의 이수 모습인데, 비록 일부가 잘려 나가고 없지만 용이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태종무열왕릉비 이후로는 이수가 남아 있는 예가 없어 무장사지에 남아 있는 이 이수는 통일신라 시기에 이수의 변천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 와서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던 파편에 남겨진 비문을 다시 새겨 넣은 비신의 전면 모습

  

비신의 측면 모습 

 

아미타불 조상비의 목 잘린 쌍 거북의 왼쪽(향좌) 귀두(龜頭)2011년에 비신을 세울 때 인근에서 찾아 붙여 놓았다. 신라 39대 소성왕(7991~8006)이 죽자 계화왕비가 "매우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하였다"고 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왕후가 입었던 6가지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창고의 쌓인 재물을 모두 다 기울여서 이름있는 장인을 불러모아 아미타 불상을 만들게 한 다음 여러 신들을 만들어 정성껏 봉안하면서 남편(소성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 노승이 있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꿈을 꾸니 진인(眞人)이 석탑의 동남쪽에 앉아 서쪽을 향해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여기가 반드시 불법이 머물 곳이다하고 마음에 새겨 두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장사 아미타불 조상비는 아미타불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상은 사라지고 비신도 깨어져 파편만 박물관에 보관해 오다가 최근에 파편에 남겨진 글씨만 다시 모아 새겨 넣은 것이다. 파편에 남아 있는 원래의 글씨는 김생의 글씨라고도 하고, 김육진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집자 하여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특히 귀부에 해당하는 쌍 거북은 소성왕과 계화왕비 같아서 애처롭다.(참고문헌 : 삼국유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주편, 부산일보,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