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100 - 맑은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는 용천사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1062번지. 비슬산(琵瑟山)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 용천사(湧泉寺)는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한 곳이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쓴『법장화상전』에 의하면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팔공산 미리사(美理寺), 계룡산 갑사, 웅주 보원사, 삼각산 청담사 등 10개 사찰을 말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이중 부석사와 비마라사, 해인사·옥천사, 범어사, 화엄사 6개 사찰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찰은 의상대사가 전파한 화엄사상을 널리 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성기에는 승려가 천여 명이나 되었고 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암자들은 백련암, 청련암, 일련암, 남암, 서암, 내원암, 부도암 외 47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오랜 세월 속에 모두 없어져버렸다. 이미 24명의 도인이 나왔고 앞으로 104명의 도인이 나올 것이라는 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 중 3중창(1631년) 때의 것은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만 남아 있고 다른 건물은 근대에 세워진 것이다.
1267년(고려 원종8년)에 보각국사 일연스님(1202~1289년)이 중창하여 불일사(佛日寺)라 하였다가 다시 용천사로 바꾸었고. 용천사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당우가 소실되었고, 1631년(인조 9) 조영(祖英) 스님이 3중창하였으며, 그 뒤로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순조 5년(1805년) 의열 화주가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천사라는 이름은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고 있어 붙여진 사명(寺名)이라고 전한다. 이 용천(湧泉)의 샘물은 가물 때나 장마가 질 때도 늘 일정한 양의 맑은 물이 흐르고 사철 마르지 않으며 한겨울에도 어는 법이 없다고 한다.
범종각(梵鍾閣) 편액 옆에 '구십칠세 효동 임환경(九十七歲 曉東 林幻鏡)'이라는 관지(款識)가 있어 환경 효동(幻鏡曉東, 1887~1983) 스님이 97세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스님이 입적한 해인 1983년에 쓴 것이며, 범종각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도 스님의 글씨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의 용천사(湧泉寺) 요사채이다.
경내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석조물 가운데 요사채 앞에 있는 맷돌의 일부분이다.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샘솟음쳐 흘러내린다고 하여 사찰(寺刹) 이름을 샘솟을 湧, 샘 泉의 용천사(湧泉寺)로 부르게 되었다는 '용천(湧泉)'이다. 편액의 글씨는 남천(南川) 김찬원(金贊源)이 썼다.
'용천(湧泉)'을 보호하기 위한 정면과 측면 각 1칸에 사모지붕을 한 보호각 건물의 사모지붕의 꼭지점에 마디가 여러 개인 항아리처럼 생긴 특수기와를 올려 놓았는데 이를 절병통(節甁桶)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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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조각한 석조보살상이 보호각 앞에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뒤에 위치한 산신각(山神閣)은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1칸 규모를 하고 있으며, 안에는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의 응진전(應眞殿)으로 근래에 중건한 건물로, 안에는 석가 삼존상을 중심으로 16위의 나한상과 제석, 범천 등이 봉안되어 있다.
맞배지붕에 앞면과 측면 각 3칸을 한 규모의 건물로, 조선 후기(17~18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대웅전은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와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석탑을 비롯해 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던 정료대와 석등 간주석이 남아있는데, 이들 석조물에서 용천사의 역사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재의 조각 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최근에 지은 명부전(冥府殿)이다. 안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비롯해 10분의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