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 편액

만공스님이 쓴 간월암 편액과 스님의 일화

徐白(서백) 2013. 1. 19. 21:28

간월암은 원효대사께서 수행하셨던 곳이기도하며, 고려말 무학대사께서 이 곳에서 수도(修道)하다 하루는 달을 보고 홀연히 도(道)를 깨치시고 난후에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볼간, 달월)이라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라 하였다. 그 후에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암자가 완전히 폐사가 된 것을 만공스님의 지시에 의해  제자인 마벽초스님께서 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간월암의 주법당에 불기2968년 신사년에 쓰신 만공스님의 편액이 눈길을 끈다.

 

두번 째 편액은 2009년 7월에 갔을 때 걸려있었던 것이고 첫번 째 편액은 2013년 1월 답사시 걸려있는 편액이다. 아무튼 간월암(看月庵)이라고 쓴 왼편에 불기2968년이란 글씨가 시선을 멈추게 한다. 왜냐하면 현재는 불기2557년(서기2013년)인데, 본인이 411년이나 앞선 미래로의 여행을 하며 즐기고 있으니 꿈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틀린 불기가 아니다. 우선 서기로 계산해보면 1941년 신사년에 쓴 편액이다.

 

 

 

송만공 스님에 관한 일화

간월암 편액에서 만공 스님의 얘기가 나왔기에 잠시 스님의 걸림없는 행동으로 인해 생긴 많은 일화 중의 일부를 옮겼다. 송만공(宋滿空, 1871∼1946) 스님은 전북 정읍시 태인면 사람이다. 13세 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여승이 됨에 따라 중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참선에 정진한 만공은 30세에 정혜사 선원조실이 되어 수많은 납자(衲子)를 배출했다.

 

만공스님이 속세에 살았다면 대단한 기인이었을 것이다. 만공은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라는 말이 생겼다.

 

어느날 험한 산길을 한 스님과 가는데, 이 동행승이 힘들어서 더는 못가겠다고 했다. 그때 마침 밭에서 화전을 일구는 부부가 있었는데 만공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냅다 달려가 여자를 덥석 안고 입맞춤을 했다. 놀란 남편은 쇠스랑을 들고 저 중놈들 죽여버리겠며 쫓아왔다. 엉겁결에 동행승도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다. 고갯마루에 올라 이제 화전 부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동행승은 만공 스님에게 그게 무슨 짓이냐고 꾸짖었다. 그러자 만공 스님은 "이 사람아, 그게 자네 탓이라고. 그 바람에 고갯마루까지 한숨에 왔지 않나. 이젠 괜챦은가?" 하였다. 스님의 이런 파격적인 행위는 그의 은사 스님인 경허 스님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다. 만공스님은 흔연히 법도를 넘어섰다는 호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1946년 어느날 76세의 노스님 만공은 저녁공양을 맛있게 들고는 거울을 앞에 두고 독백하기를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 년 동안 동고동락해왔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동안 수고했네." 하고는 요를 펴고 누워 열반에 들었다. 만공 스님다운 최후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내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