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문신 서해 선생의 별당으로 지은 소호헌
경북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길 2 (망호리)에 위치하고 있는 소호헌은 본래 안동 법흥동의 고성 이씨 이명이 그의 다섯째 아들 이고(李股)를 분가시키며 지어준 집이였는데 이고(李股)에겐 아들이 없어 그의 외동딸에게 장가 온 서해(徐懈, 1537년, 중종 32년∼1559년, 명종 14년)가 이집 주인이 되었다. 서해는 이조참의(李朝參議)를 지낸 서고(徐固)의 세째 아들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정지(挺,之), 호는 함재(涵齋)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고, 저서로는《함재집(涵齋集)》이 있다.
대구서씨종중 소유의 "보물 제475호 안동 소호헌 (安東 蘇湖軒)은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던 별당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간략한 새부리 모양의 구조를 짜았다.
누(樓)마루와 온돌방 뒤쪽으로 계자난간을 둘렀고 건물 안쪽은 민가 건축에서 볼 수 없는 재료를 사용하여 지붕 맨 윗부분에 있는 재료를 받치고 있다. 출입문 용마루 망와(望瓦)에 새겨져 있는승천하는 두 마리의 용(龍) 문양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소호헌 건물에 나타나는 오래된 수법들은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1)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진-2) 소호헌 바깥쪽에 사분합문 위에 걸려있는 "蘇湖軒" 편액이다. 옛날에 마을의 서쪽에 큰 호수가 있었고, 고려시대 때 정4품 벼슬인 시랑을 지낸 소(蘇)씨가 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소호리(蘇湖里)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소호헌(蘇湖軒)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진-3) 울타리 안 마당에서 본 소호헌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사진-4) 소호헌에서 눈여겨 봐야할 특이한 건축수법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바로 세우는 일반적인 건축수법이 아니고, 주춧돌 위에 귀틀을 짜돌리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이러한 건축수법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254-1 (장수읍 향교길 31-14)에 자리한 장수향교의 명륜당 건물에서도 사용되었다.
(사진-5) 소호헌 건물 안에 걸려있는 "藥奉先廬(약봉선려)" 편액이다. 함재 서해의 아들인 서성(徐渻)의 호가 약봉(藥奉)이다. 그대로 풀이한다면 "약봉선생의 오두막집"이란 뜻이다.
(사진-6) 소호헌 건물 내부 천장에는 특이한 형태의 솟을대공(두 재를 八자형으로 맞버티어 짠 대공)을 사용하였다.
(사진-7) 소호원 건물 옆으로 솟을삼문, 약봉태실이란 편액이 걸려있는 안채, 출입문 등이 있다.
(사진-8) 출입문 용마루 망와(望瓦)에는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승천하는 두 마리의 용(龍) 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사진-9) 맛배지붕을 한 화장실과 솟을삼문이다.
(사진-10) 정면 5칸, 측면 4칸에 대청마루와 툇마루가 있는 팔작지붕의 건물로 툇마루가 있는 측면에 이분합문을 달았다. 이 건물은 함재(涵齋) 서해(徐懈)의 아들인 약봉(藥峯) 서성(徐渻)이 태어난 안채이다.
(사진-11) 건물의 대청마루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藥峯胎室(약봉태실)"이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서해(徐懈)의 아들인 약봉(藥峯) 서성(徐渻)이 태어난 태실(胎室)은 대청마루 왼쪽 돌출되어 있는 방이다. 여기서 태실은 실제 태어난 방을 말하지만, 원래 태실은 에전에 궁가(宮家)에서 출산이 있을 때 그 출생아의 태(胎)를 묻던 석실(石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