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마애불

소나무의 절을 받고 있는 송불암 미륵불

徐白(서백) 2012. 9. 18. 09:03

충남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75번지에 자리한 송불암(松佛庵) 미륵불(彌勒佛)은 석불사라는 옛 절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당시의 석불사는 지금의 자리에서 동쪽으로 약 50m 들어간 산기슭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없어졌다고 전한다. 현재의 송불암이란 명칭은 미륵불 바로 옆의 노송이 불상과 조화를 이루며 지붕처럼 퍼져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한다. 소나무가 부처에게 절을 하고 있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 송불암 미륵불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3호로 지정되었다.

 

 

 

불교에서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 세상에 출현하실 분이다. 미륵부처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후 56억7천만년 뒤 사바세계에 내려오셔서, 화림원(花林園)의 용화수(龍華樹/龍花樹, 무우수/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하시고, 3회의 설법(용화삼회)를 열어 아직도 제도하지 못한 272억명을 교화한 후 만 6년만에 열반에 든다고 한다.

 

 

 

 

송불암 미륵불은 2000년까지 미륵불이 소나무의 아래에 위치해 있음으로써 마치 소나무가 미륵불의 광배 겸 보호수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이였지만, 소나무가 고목이 되면서 점점 밑으로 쳐져 미륵불이 소나무를 이고 있는 것처럼 되어 미륵불을 지금의 자리로 조금 옮겼다. 

 

 

 

이 불상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대형 미륵불로서 제문석불이라고도 부른다. 우리 나라의 산야에서 자주 발견되는 미륵불과 마찬가지로 투박한 민불(民佛)의 모습을 지녔다.

 

 

 

전체 높이가 4.5m에 달하는 대형으로 머리에는 4각의 보관이 있다. 상호는 대체로 둥글며 매우 인자한 형태이나 눈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고, 이마에는 백호 자리가 남아 있다. 눈이 과도하게 표현되었지만 코와 입의 조각은 사실적인 편이다. 목은 신체에 비해 다소 굵은 편이고 삼도가 표현되어 있고 법의는 편단우견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아래로 향해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왼손은 오른쪽 가슴에 댄 모습이다. 한편 불상이 올라선 하단의 받침돌은 원형의 연꽃모양인데 받침돌에는 부처님의 발이 따로 조각한 모습이 이채롭다. 미륵불의 주변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본래는 정사각형의 전각 안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불암 전설 - 미륵부처와 소나무가 신비롭게 조화를 이룬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고려 때의 일이다. 큰 원력으로 기도를 잘 하신 노스님이 계셨는데 기도를 마친 후 걸망을 지고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황룡산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노스님의 생각에 이곳이 불법을 전할 자리구나 하고는 주변을 살피는데 여러 가옥이 있고 꽤 많은 사람이 사는 부촌이었다.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을 하고 이리 저리 살피는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보시오. 누구 계시오?”하며 소리 내어 부르니 30세 가량의 남자가 물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셨습니까?” “네, 황룡산에 명당자리가 있다기에 부처님을 모시고 불법을 전해 볼까 하고 왔습니다.” “스님, 이곳에 유생들이 많아서 불교를 믿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하니 스님이“그러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풀막이라도 치고 공부를 하여 대도를 깨우쳐 볼까 합니다.”“스님 그러면 무엇을 입고 씀씀이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원래 중이란 풀뿌리 나무열매로 생식을 삼을 것이오, 송락과 초목으로서 의복을 대신하고 법당이 없으면 바위굴을 염불당으로 삼고 생활하는데 걸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과연 대사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날도 저물었으니 저의 집에서 하룻밤을 쉬었다가 가시지요.”

  노승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청년의 후한 대접을 잘 받고 가는데 그냥 갈 수가 없어 말을 꺼냈다. “절대로 화를 내지 말고 잘 들으시게. 3일 후 아침 자네 모친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날 것이야. 내가 명당 자리를 가르쳐 줄테니 다음 두가지를 꼭 지키게나. 범바위골에 묘를 쓰되 황금돌을 건드리지 말게나.”

 

청년은 이 말을 듣고 금새 화를 내며 스님을 내쫓았다. 그후 청년의 어머니는 과연 노스님의 말씀처럼 돌아가셨다. 그러나 청년은 스님의 당부말씀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범바위골만 생각이 나서 날을 잡아 묘자리를 정하였다. 땅을 파다보니 황금돌이 나왔는데, 스님의 당부 말을 잊고 그 돌을 들어냈다. 그러자 그 속에 살고 있던 수 많은 벌들이 떼지어 나왔다. 그중에 한 왕벌이 스님 때문에 살던 곳을 빼앗겼다고 하면서 이 길목을 지나고 계시던 스님의 뒷 목을 쏘아 이곳에서 스님은 열반을 하셨다.

 

그후 이곳 연산마을에는 10년간 홍수, 10년간 가뭄, 10년간 전염병 등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이 마을에 살던 광산 김씨 문중 전체는 문중회의를 열어 그 연유를 찾아 보았더니, 자신들의 실수로 스님을 돌아가시게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님의 넋을 위로하고 부처님의 크신 복력으로 마을의 재앙을 막고자 이곳에 부처님을 조성하여 세웠다.

 

그후 우연히 불상 곁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와 부처님을 향하여 크면서 마치 부처님을 옹호라도 하듯이 아래로만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형상을 본 후세 사람들이 이 소나무가 그때 그 노스님의 후신이라고 믿고 이 성지에서 기도하여 소원을 성취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신 분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