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이 즐겨 찾았던 물염정
이글거리는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의 대지 위에는 산천초목들이 다들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무더위라고 답사를 쉴 수는 없지 않는가. 사단법인 미소원 문화유적답사회에서는 7월 8일(일요일) 전남 화순과 곡성 지역을 답사코스로 일정을 잡았다. 첫 답사지로 찾아간 곳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즐겨 찾았던 '물염정이였다. 동복호를 둘러 싸고 여러 적벽들이 있는데 '물염적벽'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는 물염정(勿染亭)은 전남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373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로 김삿갓이 말년에 아름다움 풍광에 반해 자주 찾아와 시를 읆었다고 하여 더욱 유명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물염정은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또한 광주광역시관광협회와 무등일보가 공동으로 풍광이 수려하고 유서 깊은 광주전남 8대 정자를 선정하였다. 화순 물염정을 비롯하여 완도 세연정, 광주 호가정,곡성 함허정, 나주 영모정, 영암 회사정, 장흥 부춘정 등을 선정하고 물염정을 광주전남지역의 8대 정자 중 제1호로 지정했다.
그리고 이 유역에는 물염적벽(勿染赤壁)과 창랑적벽, 보산적벽, 장항적벽 등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적벽(赤壁)’이란 이름은 1519년 기묘사화 후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이곳의 절경이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물염정은 조선 중종과 명종 때에 구례, 풍기군수를 역임했던 물염(勿染) 송정순(宋庭筍)이 16세기 중엽(1566년)에 건립한 정자로 후에 외손 금성나씨(錦城羅氏) 나무송과 나무춘 형제에게 물려주었고, 그후 금성나씨 남강공파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수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가족을 남겨두고 강원도 영월을 떠나 방랑하던 김삿갓은 34세(1841년) 되던 해에 처음으로 화순 땅을 밟았으며, 1850년에 두 번째로 화순을 찾았다. 김삿갓은 50세 되던 1857년에 아예 화순 동복에 안주하며 방랑생활을 마감한다. 이때부터 김삿갓(김병연)이 물염정을 즐겨 찾았다.
그후 1863년 동복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수많은 시를 지었다. 정자 안에는 김인후, 이식, 권필, 김창협 등 조선 선비들이 물염정과 물염적벽을 노래한 시문(詩文) 20여개 이상이 걸려있다. 또한 물염정 주변에는 금성나씨 나영채 회장 공적비를 비롯해 물염정 전승비, 물염정 중수기, 김삿갓 동상과 여러 시비(時碑)들이 물염적벽과 마주하고 있다.
▲ 금성나씨(錦城羅氏) 나영채 회장 공적비
▲ 물염정 전승비
▲ 개나리봇짐에 죽장(竹杖)을 잡고 삿갓을 쓴 김병연의 동상과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현재 죽장은 훼손되고 없지만.....)
▲ 물염정(勿染亭) 편액은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 1902~1966년)의 글씨이다. 고당은 경북 현풍 출생이고 20대 중반에 전남 구례로 이주하엿다. 그의 글씨는 특히 전라도와 경남 일원의 묘비명 글씨와 누각의 많은 현판을 장식할 정도로 명필로 평가 받고 있다.
물염정은 정면과 측면 각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1966년과 1981년에 중수하고 1996년에 지붕을 교체하였다. 그런데 물염정 건물을 살펴보면 여러 기둥 중에 앞쪽의 한 기둥만이 전혀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 기둥은 1966년에 물염정을 중수할 때, 마을 주민들이 물염정의 운치와 멋을 살리기 위해 마을에서 자라던 가장 크고 멋진 베롱나무를 내어주어 정자를 짓게 배려했다고 한다. 물론 잘다듬은 기둥으로 건물을 지을 수도 있었지만 마을 주민들의 뜻을 기려 그대로 세웠다고 한다.
▲ 사)미소원 문화유적답사회 회원들 단체사진 한컷 찰칵~
나무춘(羅茂春,1580∼1619)이 인목대비의 폐출을 반대하다 삭관폐출을 당하여 귀향길에 지은 시문(詩文)이다. 나무춘(羅茂春)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 자는 대년(大年), 호는 구봉(九峯), 구화(九華), 기지(耆之), 아버지는 덕용(德用)이다. 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학유(學諭), 학록(學錄), 학정(學正) 등을 지냈다.
같은해 이이첨(李爾瞻)이 유생 이위경(李偉卿)을 시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소(廢黜疏)를 올리자, 한림(翰林) 엄성(嚴惺)과 함께 이위경을 탄핵하였는데, 양사(兩司)의 반발로 말미암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나주의 향리로 돌아갔다. 3년 뒤 복직되어 감찰을 지냈으나, 다시 파직되었다. 사후(死後) 이조참의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담양의 구산사(龜山祠)에 제향되었다.
증직(贈職) -
▲ 물염정 중수기(勿染亭 重修記)에는 명종 21년(1566년)에 창건하여 현재까지의 이건(移建)과 중보수(重補修)를 해온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 물염정기(勿染亭記) 현판
▲ 물염정원운(勿染亭原韻) 현판
▲ 물염정(勿染亭)에서 바라본 물염적벽(勿染赤壁)
▲ 물염정(勿染亭)을 떠나가전에 김삿갓 동상에서 인증샷(사진 : 박차음 회원)
김병연(金炳淵)이 삿갓을 쓰고 방랑시인이 된 이유
김삿갓으로 유명한 난고 김병연(1807~1863년)은 5살 되던 해인 1812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당시 김병연의 할아버지인 김익순(金益淳)은 선천부사였는데, 반군과의 교전에서 패하고 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듬해에 홍경래의 난이 평정된 후 김익순은 처형 당하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가족은 한양을 떠나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다 부친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김병연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와석리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살았다.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7년(순조 27년), 강원도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 대회에서 할아버지의 행적을 모르고 있던 그는 김익순의 죄상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하게 된다. 김병연이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어머니가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 주었다.
『너는 안동 김씨의 후손이다.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壯洞)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세도가 당당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장동 김씨라고 불렀는데, 너가 바로 장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네가 오늘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김익순(金益淳) 선천부사께서는 너의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홍경래의 난 때 반군에게 항복한 죄로 사형을 당하셨다. 이런 사실을 너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제사 때는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處士)로 써서 너희들을 속여 왔다......』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난 김병연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말문이 막혔다. 백일장에서 죄상을 비난한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고민 끝에 조부를 비난한 죄책감 때문에 푸른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다며 삿갓을 쓰고 정처없는 유랑에 나서게 되는데, 그의 나이 22세 무렵이다. 삿갓을 쓰고 하늘을 가린채 세상을 비웃고 인간사를 꼬집으며 정처없이 방랑하며 수많은 시(詩)를 남긴 그는 57세(1807∼1863) 때 전남 화순땅에서 객사하였는데, 3년 뒤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아들(차남)이 시신을 수습해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2009년 개명) 와석리 노루목으로 모셔갔다고 한다. 묻힌 그곳이 어딘지 아무도 몰랐다. 다만 기록에 '양백(兩百, 태백과 소백)지간. 영월-영춘 어간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이 바로 그 기록에 의지해 김병연의 무덤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