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의 사찰이야기

서백의 사찰이야기178 - 충절의 혼이 깃들어 있는 호국사찰, 강진 천태산 정수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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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178 - 충절의 혼이 깃들어 있는 호국사찰, 강진 천태산 정수사

徐白(서백) 2017. 6. 17. 10:28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정수사길 403(용운리). 천태산 자락에 위치한 정수사(淨水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옛 군지(郡誌)에 의하면, 805(애장왕 6) 도선국사(827~898)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선은 827(흥덕왕 2) 영암에서 출생하였고, 842년 승려가 되었으므로 그 연대에는 다소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창건 당시에는 이곳의 계곡을 중심으로 양쪽 언덕에 묘적사와 쌍계사의 두 사찰을 건립하여 묘적사에는 천불상을 봉안하였으나 중세에 이르러 화재로 소실되었고, 쌍계사는 수정사(水淨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동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524(중종 19) 중창하면서 이곳의 물이 유난히 맑고 맑은 기운이 사찰에 깃들어 있다고 하여 정수사(淨水寺)로 개칭하였고, 1574(선조 7) 성운이 중건하였다.

 

정수사는 임진왜란 때 200여 명의 승병들이 상주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기도했던

호국사찰이다. 대흥사에 있는 표충사의 서산대사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령장(辭令狀) 가운데 한 장은 정수사에 전해 내려오다가 광복 후에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정수사 산문(山門) 밖은 임진왜란의 격전지이다. 일본군이 구십포에 상륙했을 때 염걸이 적군을 이곳 정수사 골짜기로 유인하여 섬멸한 전적지이자 나라를 위해 전투에 참가했던 의병, 승병들을 수용했던 충절의 혼이 깃들어 있는 호국의 도량이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대파된 것을 1644(인조 22)에 종인이 현감 강유의 시주로 중건하였고, 1664(현종 5)에는 능우가 중수하였다. 1706(숙종 32) 이득종이 당시의 현감이었던 김중려의 협력을 얻어 중수하였고, 1794(정조 18) 왕명으로 고금도(古今島)에 있는 관왕묘(關王廟)를 이 절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조선말까지만 하여도 강진 부도의 사암(寺庵)들을 관장하는 수찰(首刹)이었으나 차츰 퇴락하다가 6·25전쟁 때 다시 사찰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뒤에 사찰 승려들이 지방민의 협조를 얻어 중건하였다. 1995년에는 사사자석탑을 조성하였고, 현재 대웅전, 요사채, 이름 없는 고려 도공들의 위패를 모신 도조사(陶祖祠), 응진당 등 소규모 건물만 남아 있다.

 

 

 

 

삼청루(三淸樓) 전경.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다불사상이 등장하게 되면서 삼신불, 삼세불, 53, 천불, 삼천불 등이 조성되게 되었다. 천불전에는 현재천불을 봉안하고, 삼천불전일 경우에는 과거천불과 현재천불, 미래천불을 모신다. 이를 각각 과거 장엄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이라 하며, 천불전일 때는 이 중의 현겁천불을 말한다..

 

현겁(賢劫)은 시간의 개념으로, 세상이 개벽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불경에 따르면 현겁에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후불탱화로는 53불탱화, 천불탱화, 삼천불탱화 등을 모신다. 그런데 여기서 천이나 삼천을 한정된 숫자로 볼것이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본다.

1995년에 새로 조성된 사사자삼층석탑.

 

 

 

괘불석주 - 괘불석주(掛佛石柱)는 사찰에서 행해지는 큰행사에는 많은 불자(佛子)들이 참석하게 되면 비좁은 대웅전 안에서 법회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을 대신하여 두루말이 그림 형태의 괘불을 대웅전 앞 마당에 두개의 깃대를 세워 걸고더 많은 신도들이 부처님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바로 괘불석주는 괘불을 매단 깃대를 고정하는 석주(石柱)이다. 외형은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즉 야외에 부처님을 모시는 단을 설치하여 불법(佛法)을 설()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많은 사람이 모임으로 인해 시끄럽고 떠들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야단법석(野檀法席)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관세음보살입상.

 

 

 

정수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으며 4번에 걸쳐 수리한 기록이 있다. 앞면 3, 옆면 2칸의 겹처마로 가장 단순한 맞배집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건물은 대체로 소박한 편이며, 외부 단청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고, 내부에는 무늬 일부가 잘 남아 있었는데, 근래에 보수하고 새로 단청을 하였다. 공포의 조각수법이나 남아 있던 단청 등에서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

원이삼점(圓伊三點), 이자삼점(伊字三點) - 대웅전 측면 풍판에 그려진 노란색 원은 원이삼점이다. 원이삼점은 큰 원에 점3개를 그린 것으로 보통 사찰의 지붕 등에 있다. 세 점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세로줄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가로줄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큰 원은 법계를 말하고, 원융을 상징한다. 세점은 열반의 삼덕인 법신, 반야, 해탈을 말한다. 이를 토대로 삼법 관계인 삼보, 삼학, 삼법인, 삼신(법신,보신,화신), 삼도[미혹할 혹, 業 업 업(선악의 소행), 괴로울 고등을 설명하기도 한다. 한편, 대한불교조계종의 문장인 삼보륜은 선정과 법륜을 상징하는 일원상에 삼보와 삼학을 상징하는 세 점으로 된 형상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좌상.

 

산신각.

산신각에 모셔진 석조산신상.

정수사는 고려시대 청자문화의 전성기에 청자를 굽던 도공들에게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고 선지식(禪知識)을 수백 년에 걸쳐 전해주던 공간이다. 도공들이 자주 찾아와 부처의 자비로움 속에서 정신 수양을 하고 마음을 닦아 깨끗한 마음으로 신비의 청자를 만들 수 있도록 기도를 올리던 정신적 귀의처였다. 강진군 대구면 고려청자 도요지인 당진리에서 3킬로미터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정수사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지는 않지만, "강진 정수사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843)"은 목조좌대에 쓰여진 묵서(墨書, 먹물로 쓴 글씨)를 통하여 우협시 소조불좌상이 조선시대 1561년에 조성되었고, 본존과 좌협시 목조불좌상이 조선시대 1648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석가여래삼불좌상 중 1존이 나머지 2존과 조성 시기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조성 양상마저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불상 조성 방식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우협시 소조불좌상이 일부 보수되긴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조선시대 불교미술연구에 있어서 기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포토 및 글쓴이 : 서백 김춘식 -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그리고 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